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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조선 왕조를 열다


광화문 광장은 언제나 크고 작은 축제의 열기로 사람들의 발걸음이 가볍다. 그런데 광장에서 광화문으로 이어지는 육조거리, 지금의 세종로를 따라 광화문 안으로 갈수록 가볍던 발걸음이 점점 무겁게 느껴진다. 그건 아마도 복원된 광화문의 웅장한 모습 뒤에 가려진 경복궁의 역사적 슬픔 때문이 아닐까?

                    
                
  • 험난한 세월을 지내왔지만, 광화문은 여전히 위풍당당한 모습이다.

경복궁은 1395년 창건되고 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270여 년 만에 흥선대원군에 의해 다시 복원됐다. 


역사의 흐름에 몸을 맡기다

경복궁은 언제 한양의 중심에 자리를 잡았을까. 시간을 거슬러 1392년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시기로 간다. 경복궁(景福宮)은 조선이 세워진 후 3년 뒤인 1395년에 창건되고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할 것’이라는 뜻으로 조선 왕조 건국에 일등공신 정도전이 지었다.
 
경복궁 주변에는 4개의 문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남쪽에 위치한 광화문(光化門)과 동쪽으로 건춘문(建春門), 서쪽에는 영추문(迎秋門), 북쪽으로 신무문(神武門)이 있다. 이는 사계절을 나타내며 나무, 불, 쇠, 물을 상징하는 만물을 낳게 한다는 오행설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경복궁은 1592년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타고 270여 년간 궁궐의 기능을 잃은 채 방치되다 1867년에 흥선대원군에 의해 다시 빛을 발하게 된다. 이 찬란한 빛도 잠시 1911년 경복궁 부지의 소유권은 조선총독부로 넘어간다. 주인을 잃은 경복궁은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가 열린다는 명목으로 주요 몇 채를 제외하고 90퍼센트 이상의 전각을 헐었다.
 
또한 일본은 1926년부터 조선총독부 청사 건축으로 모든 시설을 제거하는 한편 광화문 해체는 백성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혀 건춘문 북쪽으로 옮기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가까스로 명맥을 이어오던 광화문은 결국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석축만 남고 1968년 철근 콘크리트로 복원 아닌 복원을 했다. 2006년부터 본격적인 광화문 복원사업을 추진하면서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와 광화문의 철근 콘크리트도 걷어 내고 마침내 2010년 원래의 모습을 찾았다.
 

  •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현장으로 역사적 아픔이 서려 있는 건청궁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일으킨 일본의 만행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가슴에 담아두고 잊지 말아야 한다. 


경복궁 주인을 잃다

흥선대원군은 아들 고종이 왕의 자리에 오른 후 10년 간 섭정을 했다. 고종은 1873년(고종 10)에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건청궁(乾淸宮)을 지었다. 경복궁 내 많은 전각 중에 ‘궁’이라는 이름을 가진 곳은 건청궁뿐이다. 다시 말해 고종은 아버지와의 선을 긋고 자신만의 정치를 위해 궁궐 안에 궁을 지은 것이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대해 본격적인 내정간섭을 시작한다. 이때 친러정책으로 맞선 명성황후는 일본엔 눈엣가시였다. 1895년 10월 8일 건청궁에 머물던 명성황후는 일본자객으로부터 무참히 살해당하고 그 시신이 녹산에서 불태워지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역사적 참극, 바로 을미사변(乙未事變)이다.

을미사변 이후 궁을 장악한 일본군에 고종은 항상 신변 위협을 받고 살았다. 고종은 다른 나라에 몸을 의탁하기로 하고 미국공사관으로 피신을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1896년 2월 11일 세자만 데리고 궁을 빠져나와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에 성공한다. 이를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 한다. 조선의 국모가 궁궐 내에서 살해를 당하고, 왕은 궁을 빠져나와 다른 나라에 몸을 의탁하며 조선 왕조는 안타깝게도 경복궁으로 끝내 돌아가지 못했다.
 

1896년 2월 11일 고종은 일본의 눈을 피해 경복궁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신한다. 이를 아관파천이라 한다.

 

배려의 미학

  • 향원정은 왕족들의 휴식 공간으로 취향교를 통해 갈 수 있다.

향원정(香遠亭)은 왕족들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으로 함화당과 집경당 북쪽 후원에 향원지라는 연못 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보통 정자와 달리 2층 구조로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으며 1층은 구들을 들여 난방할 수 있다. 향원정으로 가기 위해서는 취향교(醉香橋)를 건너야 하는데 원래 북쪽에 있었으나 6·25 때 파괴되고 1953년 남쪽으로 놓았다.

향원지의 물은 ‘차고 맑은 물의 근원’이라는 열상진원(洌上眞源)샘에서 시작된다. 샘물은 연못의 물보다 차가워 연못 속 물고기가 놀랄 수 있기 때문에 샘의 물길을 꺾어 둘러 들어가게 함으로 그동안 수온이 올라가도록 만들었다. 

 

물 위의 예술품

  • 경회루는 태조 창건 당시는 작은 누각이었으나 계속되는 중수공사로 그 규모가 커지고 웅장해졌다.

경회루(慶會樓)는 왕이 큰 연회를 열거나 외국 사신을 접대하던 곳이다. 태조 때 만들어진 경회루는 처음엔 작은 누각이었으나 1412년(태종 12) 연못을 확장하고 누각도 새로 크게 지었다. 1429년(세종 11) 1월에 또 한 번의 공사를 하는데 세종실록에는 경회루를 창건하였다고 할 정도로 큰 규모의 공사가 진행되었다.

안타깝게도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되었고 흥선대원군에 의해 다시 보수하게 된다. 경회루는 주역(周易)을 기초로 지었다는 옛 기록이 있다. 아름다움과 더불어 각각의 의미가 살아 숨 쉬는 건축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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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뒤로 조선 왕조의 역사와 정신을 담고 있는 경복궁
아름다운 향원정을 걷는 동안 고종과 명성황후가 돼보면 어떨까요? 

트래블투데이 김남현 취재기자

발행2016년 02월 12 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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