쏴아아 부서지는 파도소리만 무성하다. 시간을 조금 더 지체하면 학교에 지각을 할 시간이지만 애꿎은 모래알만 매만지고 있다. 걸어갈 때마다 도시락 가방에서 나는 달각달각 수저 부딪히는 소리가 싫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엄마는 늘 억척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는 순댓국 장사만 벌써 20년째다. 늘 푹푹 찌는 큰 솥 앞에서 걸핏하면 대낮부터 술 한 잔 걸친 공사판 아저씨들 앞에서 걸걸한 말을 하며 지낸 세월이 엄마를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엄마는 늘 도시락에 머릿고기와 순대 그리고 새우젓만 싸주셨다. 나는 그런 엄마가 미워 일부러 도시락을 놓고 간 적도 있다. 다른 애들은 몰라도 신애는 점심시간이 오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으니까. 엄마는 내가 일부러 놓고 간 것을 알아챘는지 복에 겨워서 저런다며 한 소리 했다.
모래알만 매만지던 나는 터덜터덜 교실로 들어갔다. 수업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국어시간이었고 김정한의 모래톱 이야기를 배웠다. 모래톱이야기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건우의 이야기인지 나 자신의 이야기인지 모를 정도로 비슷한 점이 많다고 생각했다.
나룻배를 타고 통학하는 건우.
갯배를 끌고 나가 통학하는 나.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가진 섬마을에 사는 건우.
실향민들로 이루어진 아바이마을.
내가 살고 있는 아바이 마을은 분단의 아픔이 고스란히 적셔있는 마을로 어려웠던 전후시대를 살아오며 고단하고 억척스러운 곳이었다.
부둣가로 올라오면 생선 비린내가 자욱했고 쪼그려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움푹 파인 마음의 주름을 부서지는 파도에 쓸어내리는 그런 곳.
나는 창밖에 부서지는 모래성을 바라보았다. 아슬아슬 하얀 거품에 스러지지 않기 위해 슬금슬금 뒷걸음을 치는 모래성이다. 쏴아아 쏴아아 겁 없는 파도는 모래성으로 돌진하였고 결국 파도는 모래성을 집어삼켰다.
모래톱 이야기에서 건우는 더 이상 학교에 나오지 않는다.
분단으로 인해 고향으로 가지 못한 설움이 남아있는 곳. 파도가 그 설움마저 무너뜨리는 것 같았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쳤다. 무심하게 발로 도시락 가방을 톡 건드려본다.
‘달각’ 소리를 낸다.
윗동네에 사는 은서가 도시락 가방을 들고 내 자리로 왔다. 나란히 앉아 도시락 가방을 연다.
은서는 새하얀 쌀밥에 멸치볶음에 장조림을 싸왔다. 내 반찬은 어김없이 머릿고기에 순대 그리고 새우젓일까.
어쩌면 나도 멸치볶음에 장조림을 싸주지는 않았을까?
창밖의 갯배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왔다 갔다를 반복한다. 신기한 듯 갯배를 타고 오가는 사람들이 갯배를 타고 오고간다. 신기한 듯 배를 타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드라마 때문일까 어느 날 부턴가 갯배는 헤어진 연인들의 아련한 추억의 공간이 되었고 짙은 녹색에서 희미한 푸른색의 느낌을 띄기도 했다.
반찬통을 열기도 전에 익숙한 냄새가 풍겼다.
도시락 가방을 두고 갔던 날. 엄마는 알고 있었을까. 내가 싫었던 건 엄마도 아니고 돼지 비린내도 아닌 ‘달각’소리였다는 것을.
대륙, 대륙, 그놈의 대륙. 친구들이 인터넷을 보며 웃고 떠드는 소리가 거슬렸다. 중국에서 또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나를 겨냥하여 하는 말일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조현아, 너도 이리 와서 이것 좀 봐봐.”
내 이름은 홍조현. 다른 이름은 훙쭈셴. 주성치는 알지만 저우싱츠는 모르는 것처럼, 아이들도 홍조현이라는 이름만을 알고 있다. 아버지는 한 때 청순 미녀로 이름을 날렸던 한 홍콩의 여배우의 이름을 따서 내 이름을 지으셨다지만, 친구들에게 조현이란 그저 남자 같은 이름일 뿐이었다.
내 어머니의 이름은 이연경이지만, 아버지의 이름은 훙원줘다. 나는 중국인 2세다.
아버지를 본 적은 없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셨다고만 하시고 자세한 설명을 해 주지 않으셨지만, 아마 젊은 시절의 어머니는 불법체류자인 중국인과 사랑에 빠졌을 것이다. 친척들과 아무런 왕래가 없는 것으로 보아, 그 일로 인해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했음이 분명하다.
얼굴도 본 적이 없는 아버지를 그저 아버지이기 때문에 사랑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나는 아버지가 미웠다. 어머니를 미혼모로 살게 하고, 나를 아버지 없는 아이로 만든 것이 미웠다.
아니, 이것도 거짓말이다. 나는 아버지를 미워 한 적이 없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러니까 내 기억이 시작 될 무렵부터 아버지가 없었기 때문에 친구들에게는 다 있는 아버지가 내게만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는 이미 아버지가 없는 가정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데 며칠 전, 아버지가 편지를 보내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버지가 보낸 편지를 아주 오랜만에 읽어 보게 된 것 뿐이다. 내게 아버지가 없는 이유가 아버지가 중국인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나는 한 달에 한 통 꼴로 도착하는 아버지의 편지를 한 번도 열어보지 않았다.
현관에 들어서서 신발을 벗기가 무섭게 아버지의 편지를 건네는 어머니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어머니 앞으로 온 편지에, 아버지가 다음 달 즈음에 한국에 오신다고 적혀있었다고 했다. 편지를 받아 든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바로 편지를 뜯어보지 못하고 침대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화가 나지도, 기쁘지도 않았다. 그저 얼떨떨하여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을 뿐이었다.
내가 아직 글을 다 떼지 못했을 무렵에는 항상 어머니가 나를 무릎에 앉히고 편지를 읽어 주셨는데, 이제 보니 아버지는 아직도 한국말이 서툴렀다. 첫머리에 ‘사랑하는 나의 딸, 조현에게’라는 글씨가 삐뚤빼뚤하게 적혀 있었다. 어린애 같은 글씨에 웃음이 나왔다.
문 밖에서 내 반응을 조심스레 살피시던 어머니가 그 동안 모아 두었던 내 몫의 편지들을 가져다 주셨다. 십여 년 어치의 편지들이 상자 안에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네가 나중에라도 읽고 싶어질 것 같아 버리지 않고 놔뒀었어.”
나도 모르게 고맙다는 대답이 나와 버렸다. 나는 거의 백 통 가까이 되는 그 편지들을 밤을 새워 읽었다. 단 한 번도 답장을 쓰지 않은 것에 대한 원망이 한 마디 쯤은 섞여 있을 줄 알았는데 백여 통의 편지에는 한결같은 말들이 적혀 있었다. ‘미안하다, 그리고 사랑한다.’라고.
그리고 오늘,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차이나타운을 찾았다. 오정희의 유명한 소설 <중국인 거리>의 배경이 되었던 바로 그 거리다. 잠시 심호흡을 한 뒤 중화가 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버지의 거리였다.
간장게장도 아닌 것이 금세 밥 한 공기를 뚝딱하게 만든다. 그래서인지 내 학창시절 도시락반찬 단골메뉴 이기도 했다. 해산물이나 젓갈류를 유난히 좋아하는 나를 보고 우리가족은 누가 해안가에서 자란 아이 아니랄까봐 식성에서 본적이 나온다고 했다. 그러면서 시집은 보나마나 해안가로 가게 생겼다고 하였으나 정반대였다. 삶은 그렇게 가끔씩 엇나가는 맛이 있었다.
혼기가 꽉 들어차고 나서야 뒤늦게 선을 보았고 그마저도 잘 들어오지 않았다. 제비가 박씨를 물어다 주는 격으로 엄마의 친구들이나 교회 지인들에의해 무미건조한 선을 보게 되었고 그렇게 집안과 집안의 묵은 숙제거리를 해결하는 것처럼 의식이 치러졌다.
친정과 다소 먼 곳으로 시집을 가서일까 엄마는 결혼식 내내 눈물을 보이셨다. 식 전날 엄마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눌때만해도 속이 다 시원해서 껄껄껄 웃으면 어쩌냐고 했는데 눈물바람이다.
폐백을 할 때에 양가 부모님께서는 대추와 밤을 던져주면서 행복하게 잘 살라고 말씀해주셨다. 특히 시어머니는 아들가진 사람의 유세였을까? 나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기에 그저 아이 이야기만 하실 뿐 행복하게 살라 던지의 말은 일절 없으셨다.
다행이 남편과의 관계가 나쁘지는 않았다. 서로 나이를 먹어가는 동지애랄까. 연애결혼과는 느낌이 사뭇 달랐고 서로가 생각했던 결혼의 이상향은 아니었겠지만 서로를 의지하며 도란도란 살 수 있었다.
친정식구들의 입맛은 내가 젓갈을 좋아하는 것처럼 짜고 매운 것에 길들여져있었다. 같은 음식을 먹는다고 해도 소금이나 간장의 양이 달랐다. 시댁식구들은 대체로 싱겁고 가벼운 음식들로 먹었다. 나는 시부모를 모시고 살았으므로 간을 싱겁게 한다고 했음에도 시어머니께서는 늘 구박을 하셨다. 간 하나도 제대로 못 맞춘다고. 시어머니는 짠 음식에 대한 거부가 거의 경멸에 가까웠다. 내가 첫 아이를 가졌을 때 친정음식이 너무 먹고 싶어 엄마가 싸준 어리굴젓 한통을 가지고 온 적이 있었다. 그때 시어머니는 길길이 날뛰면서 식탁에 올릴 생각도 말라고 했다. 그럴 때마다 못된 생각이었지만 늙어서 보자는 생각으로 꾹꾹 참았다.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렇게 되어버렸다.
시어머니의 치매판정이었다. 점점 기억은 흐려지고 아이가 되어버린다는 것이었다. 친구들은 네가 시집살이 하나는 제대로 한다며 혀를 끌끌 찼다. 생각해보니 정말 그런 것 같다. 결혼을 탐탁지 않아했던 시부모와 한 집에서 사는 것도 요즘 사람들이라면 식겁할 일이었는데 그런 시어머니의 병수발이라니.
시어머니의 병세는 생각보다 진전이 빨랐다. 의사선생님께서는 기억이 흐려지면서 신경이 예민해져 신경질을 부릴 수도 있으니 가족들이 이해를 하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정말 그랬다. 시어머니는 실제로 평소보다 더 잦은 신경질을 부렸다. 싱겁게 만들라고 했던 반찬들을 뒤엎으며 소금 가져오라고 소리 소리를 지른 적도 있다. 그래서 소금을 가져다 드리면 짠 것을 먹여 자기를 죽이려고 그런다고 욕설 섞인 소리를 내뱉었다.
아무리 가족이라지만 아이 키우랴 집안 살림하랴 치매 노인 병수발까지하랴. 점점 기운이 빠졌다. 언젠가 시어머니가 바지에 실례를 했을 때 욕실에 시어머니를 앉혀두고 배설물로 뒤섞인 옷가지를 번갈아 보고 엉엉 운적이 있다. 시어머니는 욕실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우는 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울지 마. 내가 미안해.”
“우리 어머니 많이 변했네. 나한테 미안하단 말도 하고.”
“미안해. 내가 많이 속상했나보네. 우리 아가.”
어머니? 어머니!
시어머니의 눈빛은 여전히 총기가 없었다. 씻기 위해 발가벗고 욕조 안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 정신이 돌아온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
“어머니, 정말 많이 변했다. 나한테 아가라고도 해주고.”
“나 그거 먹고 싶다. 니가 맛있다고 했던 거.”
“아, 어리굴젓이요? 웬일이래. 얼른 씻고 따뜻한 밥에 어리굴젓하고 우리 밥 먹어요.”
오랜만이다. 시어머니와 마주하고 앉아 먹는 밥. 따뜻한 밥에 알싸하고 매콤한 어리굴젓 올려 입에 넣으니 숨통이 트인다.
지금으로부터 80여 년 전, 영도에는 조선 팔도에 하나 뿐인 기상천외한 다리가 생겼다. 배가 지나갈 때마다 다리를 들어 올리는 구조의 도개교가 생겨난 것. 돛단배와 우마차가 다니던 시절에 배가 지나갈 수 있도록 다리가 열리니, 이 얼마나 커다란 구경거리인가! 영도다리 개통식에는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로 팔십 대 노인 한 분을 초빙하여 다리를 건너는 퍼포먼스를 벌였고, 전국 각지에서 이 다리를 보려는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영도다리 앞은 항상 구름 같은 사람이 몰린 진풍경이 펼쳐졌다고 한다.
그런데 일이 참 묘하게 되었다. 1950년, 전쟁이 터지자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게 된 이들이 천지였는데, 이들이 하나같이 ‘영도다리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한 것이다. 부산 땅까지 모두가 무사히 왔을 리가 만무한데도, 어미를 찾고 자식을 찾고 지아비를 찾는 행렬은 끊이지 않았다. 40계단과 영도다리 사이를 오가며, 사람들은 탄성 대신 울음소리를 내질렀다. 다리가 열리든 말든 이제는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전국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영도다리 앞은 오래도록 북적였단다.
“어느으 세에워얼에에 너와아 내가아 마안나아…….”
“할아버지! 그 노래 좀 그만 불러요, 진짜!”
아버지가 또 어디서 막걸리 한 잔을 걸치고 오신 모양이었다. 이제 수험생이 된 딸아이는 제 할아버지가 술에 취했을 때마다 신경이 날카롭다. 앞서 영도다리 이야기를 했다고 해서 혹여 아버지가 어머니를 영영 만나지 못했을 것이라 지레짐작하고 있다면 큰 오산이다. 조금만 있으면 어머니가 방에서 나와 아버지에게 불호령을 내릴 것이다.
아버지는 40계단과 영도다리를 오가며 꼬박 세 달을 기다린 끝에 어머니를 만났다. 영영 못 만나는 줄 알았다며, 두 분은 영도다리 아래서 얼싸안고 엉엉 우셨다고 한다. 원래부터 공처가이셨던 아버지는 그 기적적인 재회 이후로 평생 어머니만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했다.
“당신, 현정이 수능 못 보면 책임 질겨? 당장 그 노래 그치지 못하는가?”
그래서 어머니가 한 마디만 하시면 온 집안이 조용해진다. 한 번쯤 성을 내실 법도 한데, 아버지는 어머니의 얼굴만 봐도 행복하신 모양이었다. 아버지가 순한 강아지처럼 방으로 끌려 들어가신 뒤에 현정이가 한숨을 내 쉰다.
“아빠, 아빠도 엄마한테 저렇게 좀 잘 해 봐. 맨날 싸우지 좀 말고.”
내가 아내에게 나쁜 남편이라고 생각하면 그것도 오산이다. 다만, 아버지만큼 잘 하기가 정말 힘들 뿐이다.
현정이가 아주 어렸을 때, 나와 크게 싸운 아내가 짐을 싸서 친정으로 돌아가 버린 일이 있었다. 잘잘못을 따지기 어려운 일이라 누가 먼저 사과를 하느냐가 문제인 자존심 싸움이 되어버렸는데, 그 때 아버지가 나를 집 앞 대폿집으로 끌고 가셨다.
“이 녀석아. 사랑은 아무나 하는 줄 알어? 내가 그 때 네 엄마를 못 만났으면 말야, 가정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는겨. 내 인생의 낙이 죄다 사라질 뻔 한 겨!”
또 그놈의 사랑 타령. ‘아버지가 뭘 아신다고 그래요?’하고 대꾸를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사랑에 있어서만은, 아무도 아버지를 이길 수 없었다.
아버지는 또 영도다리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전쟁이 나기 전에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고구마랑 김밥을 싸 가지고 영도다리를 구경하러 왔었는데, 그 때 어머니가 그렇게나 예뻐 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틈만 나면 어머니를 데리고 영도다리에 왔다고 한다. 아버지는 전쟁 통에 어머니를 잃어버리셨는데, 어디서 만나자 약속을 하지 못해서 무작정 어머니가 좋아하던 영도다리에 오셨다. 다른 먹을거리는 다 마다하고 기도하는 기분으로 고구마랑 김밥만 먹으며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데, 어느 날 거짓말처럼 이쁜 아낙네 하나가 고구마랑 김밥을 먹으며 영도다리를 올려다보고 있더란다.
“그게 바로 운명이라는 거여. 너랑 며늘아가 사이에도 영도다리 같은 게 꼭 하나 있을 것인디, 그걸 모르니까 싸우고 그러는 거 아니여.”
그랬다. 어느 세월 속에서, 나와 아내가 만나 점을 하나 찍기까지 영도다리 하나가 없었을 리가 있는가. 나는 연애하던 시절의 앨범들을 죄다 펼쳐보고는 우리만의 영도다리를 찾아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팔십이 넘은 노인네들이 결혼기념일을 맞아 여행을 보내 달라고 성화셨다. 나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던 것처럼 ‘그럼 영도다리는 어떠세요?’하고 묻고, 아버지는 ‘영도다리? 이번엔 거길 한 번 가 볼까?’ 하신다. ‘임자, 올해는 영도다리에 가 보래.’ 하시며 아버지가 방으로 들어가시자, 현정이가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묻는다.
“맨날 똑같은 데 가면서 왜들 저러시는 거야?”
“녀석아, 사랑은 아무나 하는 줄 알아?”
어이없어 하는 현정이를 두고, 나는 즐겁게 차편을 예매했다. 올해에는 오십여 년 만에 영도다리가 열린다고 했다.
간만에 친구들을 만나 수다 좀 떨었다. 고등학생일 때부터 줄기차게 보던 얼굴들이기는 하나, 기혼자 다섯 명이 한꺼번에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요즘은 늦게 하는 결혼이 대세라는데 내 친구 녀석들은 뭐가 그리 급한지 스물다섯 먹던 해부터 줄기차게 시집을 갔다. 스물다섯, 스물여섯, 스물일곱, 스물여덟, 이렇게. 다들 아홉수를 피하려고 작정을 한 건지 마의 스물아홉 이전에 전부 유부녀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 뒤 나 혼자 독신녀로 남아 저 독한 유부녀들을 상대했다. 친구들은 남편 얘기, 아이 얘기, 아니면 또 다른 애인 얘기에 여념이 없는데, 나는 뭐 일거리 말고는 할 만한 얘기도 없었다. 남자아이돌들을 좋아하긴 하나, 친구 녀석들한테 얘기해봤다 정신 못 차렸다며 잔소리나 들을 테고. 그래서 친구들이 수다 떨 동안 조용히 쭈그린 채로 음식에 심취하거나,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며 리액션을 해주었다. 아, 가끔 야한 이야기를 할 때는 집중해서 들었다.
그러다 서른다섯 겨울, 드디어 나도 결혼이란 걸 하게 됐다. 상대는 나보다 세 살 많은 회사원. 평소 핥던 아이돌처럼 얼굴이 잘나지도, 몸매가 뛰어나지도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그래도 같이 있으면 말이 통하고 편안해서 살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을 준비하던 무렵, 친구 녀석들이 나에게 넌지시 물었다.
“동준씨, 기력은 좀 있어?”
나는 무슨 소린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친구 녀석들은 서로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눈치만 봤다. 그 중 미경이가 총대를 메고 입을 열었다.
“아니, 너네 애기도 낳을 거라면서 신랑 기운이 좋아야 2세를 낳지.”
순간 얼굴이 좀 붉어졌지만, 미경이 말이 맞다 싶었다. 우린 만나기만하면 서로 죽겠다며 피로를 토하고, 카페에서 책을 읽다가 고개를 젖힌 채 잠들기 일쑤였다. 이래가지고 어디 자식 보겠나 싶어 걱정이 됐다. 그때 혜진이가 내 표정을 읽었는지 입을 열었다.
“우리 다음 주에 광양에 어른 물 받으러 갈 건데, 너도 갈래?”
“어른물이라니, 물중에 어린 물도 있고 늙은 물도 있나?”
“야야, 알아듣게 설명을 해줘야지. 광양에 고로쇠물이 유명하다잖아. 미경이 남편이랑 우리 남편이 요즘 영 골골거리고 지루해서 우리 다음 주에 물 받으러 갈 거야. 고로쇠물이 기력 회복에도 좋고 비뇨기 계통에도 아주 좋다더라고. 너도 갈래?”
결혼준비도 중요하지만, 결혼 후의 생활을 생각하니 갑갑해지는 게 사실이었다. 그이나 나나 나이 마흔이 다 되어 가는데, 신혼도 즐기고 아이도 가지려면 역시 몸관리가 필수지! 가구랑 전자제품 들어오는 날짜를 어찌저찌 계산하다보니, 결혼 일주일 전 딱 반나절 정도 시간이 비었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바로 광양으로 향했다.
약수통 하나 들고 룰루랄라 가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현실은 생각과 전혀 달랐다. 왜 난 백운산 중턱을 오르고 있는가! 왜 아무도 나에게 산으로 올라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단 말인가! 물먹으러 사람들이 이런 산중까지 올라오다니 이해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어느 정도 걸어 들어가니 평지와 함께 고로쇠나무들이 등장했다. 나무마다 하얀색 물통이 꽂혀 있었고, 나무에 꽂혀 있는 호스를 통해 고로쇠 물이 한 방울이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겉보기엔 그냥 맑은 물인데 이거 한 말에 오만 원씩이나 한단말야? 아깝다. 이 돈이면 족발을 아주 그냥 원 없이 먹을 수 있는데.”
“아서라, 너는 그게 예비 신부가 할 말이냐? 이리 와서 어른 물 한 잔 마셔봐. 고로쇠 물로 끓인 백숙도 죽여줘.”
혜진이의 닦달에 고로쇠 물 한 모금 먹고, 백숙 한 점 뜯었다. 신기하게도 물이 달았다.
“야, 어른 물 생각보다 달고 맛난다. 어른은 쓴물만 먹고 살아야 되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단물 먹어도 되는 거야? 어른 좋네.”
그 후로도 나는 한참동안 닭 한 점 뜯고 고로쇠 물 마시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처음에는 한두 잔만 주고, 동준씨 갖다 줄 생각이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약수통이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그래, 동준씨만 기력 차리란 법 있나? 애는 내가 낳는 데 내 몸부터 챙겨야지. 고로쇠 물에 푹 빠져 입맛을 다시는 날 보고 미경이가 말했다.
“지금 많이 마셔 둬. 너 이제 시집가고 나면 쓴 물 배터지게 먹을 테니까.”
나는 약수통 바닥에 남은 고로쇠 물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잔에 부었다. 그리고 잔 바닥까지 핥아 마셨다. 캬, 어른 물 달다.
성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환승을 위해 모란역에서 서울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사거리 너머로 시끌시끌한 장터가 눈에 띄었다. 오늘이 4일이니 모란장이 선 모양이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기일 전후로 일 년에 한 번씩은 꼭 이곳을 지나지만, 모란시장이 눈에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돌아가시기 전에 어머니는 줄곧 모란시장 얘기를 하셨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종종 나를 데리고 시장 구경을 가셨다는 것이었다. 너무 어렸을 때라 그런지 내 머릿속에는 모란시장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지만,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인지 나도 모르는 새에 길을 건너고 말았다.
집 근처에 대형 할인점이 생긴 뒤로 전통시장에 발을 들여놓는 것도 처음이었다. 고무줄 바지와 중국제 그릇들, 가짜 골동품, 싸구려 길거리 간식 등 식재료를 제외하고는 없는 이곳에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드는지를 물었더니, 어머니는 웃으며 ‘다 사람 보러 가는 거지, 뭐.’ 하셨다. 구수한 음식 냄새와 함께 할아버지들의 사투리, 아주머니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을 보러 온다더니, 정말 동네잔치 같은 느낌이었다. 개고기로 유명한 모란시장이지만, 장날이라 그런지 애완 강아지며 고양이, 토끼들도 눈에 많이 띄었다. 사람이 신기한지 눈을 동그랗게 뜬 모습이 귀여워 그 앞에 한참을 서 있는데, 갑자기 시끄러운 뽕짝 소리가 들려왔다.
“일어서 보소. 품바 왔네, 품바!”
노점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던 할아버지 몇 분이 일어서시더니 음악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향하셨다. 말로만 듣던 품바 공연이 펼쳐진 모양이었다. 색동옷을 입고 연지곤지를 찍은 아저씨들이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는 것을 구경하던 나는 어머니와 함께 모란장을 방문했던 기억 중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아홉 살짜리의 눈에 비쳤던 품바 공연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넋을 쏙 빼놓을 만큼 시끄러운 것이었다. 저만치서 들려오는 흥겨운 가락에 얼마나 넋이 빠졌던지 나는 그만 어머니의 손을 슬그머니 놓고 공연단 앞으로 달려가고 말았는데, 그 자리에서 가만히 있었으면 될 것을 또 어머니를 찾아 이리저리 헤맸었다. 삼십여 분을 헤맨 끝에야 울음이 터졌고, 근처에서 사탕을 파시던 할머니 한 분이 나를 얼른 안아 올렸다.
“왜 그러냐, 아가. 엄마 잃어버렸누?”
나는 고개만 끄덕거리며 엉엉 울었다. 우는 애 달래는 데 옛날 얘기만 한 게 어디 있겠는가. 할머니는 ‘옛날 옛날에 말이야’ 하며 이야기의 서막을 여셨다. 옛날 옛날에 북에서 온 사람 하나가 북한의 산 이름을 따서 ‘모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었다.
“모란봉도 모란봉이지만, 제 어미가 그리워서 어미 모 자를 쓰려고 했다고도 한디야. 딱 이 자리에서 너처럼 ‘엄마, 엄마’ 하며 울었단 거야.”
다 큰 어른이 엄마를 부르며 우는 모습이 우스워 울음을 그친 나는 할머니가 물려주신 사탕을 빨며 얌전히 어머니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찾아낸 어머니는 내게 매운 꿀밤 한 대를 먹이면서도 사탕을 봉지 가득 담아 손에 들려주셨다.
품바 공연이 끝나고 휑해진 자리에 가만히 서서 나는 어머니를 생각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줄곧 모란시장 얘기를 하셨다.
“거기 말이야, 오리도 팔고 병아리도 팔고 네가 좋아하는 커피 사탕도 팔았지.”
내가 어머니만큼 자란 다음에도 어머니는 가끔 비닐봉지 가득 커피 사탕을 사 오셨다. ‘어휴, 엄마는 왜 자꾸 시장 물건을 사오고 그래.’하고 나는 가끔 어머니에게 되려 짜증을 내기도 했다. ‘다 사람 보러 가는 거지, 뭐.’ 하며 멋쩍게 어머니의 모습이 오래도록 머릿속을 맴돌았다.
마음이 불안하다. 내가 로버트를 처음으로 만난 것은 3년 전. 로버트는 우리 학교의 교환학생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외국인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온 나이기에 괜히 더듬더듬 말을 붙여 본 것이 인연이 깊어졌고, 우리는 어느 새 연인이 되었다.
창밖으로 로버트의 모습이 보였다. 성큼성큼 다가와 내 앞에서 환히 웃는다. 카페 안의 시선이 일순간 모두 나에게로 쏠리며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로버트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고, 로버트 또한 그렇다. 우리 둘만 행복하면 다 괜찮은 거라 생각은 하고 있지만, 평생을 함께 헤쳐 나갈 수 있을지, 나는 불안하다.
우리 둘은 아직 한 번도 다퉈 본 일이 없었다. 성격이 잘 맞아서이기도 하지만, 로버트가 상상 이상으로 나를 배려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남들의 시선이다. 영국 남자와의 연애에서 결혼생활까지를 그리고 있는 웹툰이 큰 인기를 끈 이후로 젊은 사람들의 시선은 눈에 띄게 부드러워 졌지만, 우리가 손을 잡고 길을 걸을 때면 어르신들이 눈을 흘기며 혀를 차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오랜만에 보는 정장 입은 모습이 낯설었다. 오늘 저녁에 로버트는 처음으로 우리 집을 방문하게 될 것이다. 2년 넘게 사귀어 온 남자친구를 소개하겠노라 선언하고 집을 나왔는데, 그 남자친구가 미국인이라는 것은 아직 말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혹시 거리의 사람들처럼, 우리들의 모습을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으실까.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내 선택에 불만이 없다. 행복하게 살 자신도 있다. 로버트는 나와 결혼 한 후에도 한국에서 계속 살고 싶다고 말했으므로, 지금 내 생활에서 많은 것이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아이를 낳게 된다면, 아이가 이런 시선을 견딜 수 있을까. 내가 눈 앞의 행복 때문에 욕심을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테이블에 놓인 커피에는 입도 대지 않고 입술만 물어뜯고 있자, 불안한 마음을 눈치 챈 듯 로버트가 내 손을 잡았다.
“걱정, 안 돼.”
‘그럼, 안 되지. 우리 둘은 잘 헤쳐가 갈 수 있을 거야.’하고 나는 스스로 마음을 다잡는다.
“점심으로는 뭐가 좋을까.”
잠시 고민하던 로버트가 좋은 생각이 났단다. 그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부대찌개 집이었다. 정장을 입고 부대찌개를 파는 식당에 올 줄은 몰랐는데, 로버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기세 좋게 이모를 부르며 부대찌개 2인분을 시킨다.
아직 한국어가 서툴지만, 그는 어디에 가서도 기가 죽지 않는다. 자라온 환경의 차이 탓일까. 나도 내향적인 성격은 아니지만 걱정이란 게 없어 보이는 로버트를 보면 부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찌개가 끓자 로버트가 내 앞의 접시를 가져가 찌개를 덜어 주었다. 그런데 내 몫의 접시에는 햄만 가득 담겨 있었다. 건너다보니 로버트의 접시에는 김치만 담겨 있다. 의아한 내 표정을 본 로버트가 웃었다.
“혜연은 햄을 좋아하고, 나는 김치를 좋아해. 그래서 나는 부대찌개가 맛있어.”
문득 한국 전쟁 이후 이곳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부대에서 나온 햄을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고추장이나 김치 등의 재료를 넣어 끓인 것이 부대찌개라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로버트는 마냥 즐거워 보였다.
처음에는 김치는 물론이고 라면도 잘 먹지 못하던 로버트인데, 매일같이 나와 함께 있다 보니 어느 새 김치 국물에 밥도 비벼 먹을 정도로 매운 맛에 익숙해졌다. 김치에 파를 얹어 먹는 모양새가 이제는 제법 한국인 같기도 했다.
“맛있을 거야, 앞으로도.”
“유코, 여기야!”
공항에서 부르는 일본 이름이 조금 낯설었다. 몇 년 전부터 펜팔을 주고받아 오던 일본인 친구가 드디어 한국 땅을 밟게 된 것이다. 유코는 상기된 표정으로 내 쪽으로 다가왔다. 둥근 얼굴에 긴 머리를 가진 유코는 내 예상처럼 키가 작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일본 소녀였다.
“안녕, 미주. 만나고 싶었어. 나는 한국을 많이 좋아해.”
이번 여행을 위해 한국어를 많이 공부했다는 유코가 더듬거리며 인사를 건넸다. 나는 유코를 꼭 안아 주었다.
공항을 떠나 우리 집이 있는 강북 쪽으로 향했다. 한국은 물론이고, 외국에 나와 본 것이 이번이 처음이라는 유코는 많이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 편지에서 ‘한국인들은 일본인을 많이 싫어하지 않느냐’고 물었는데, 그것을 신경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유코를 데리고 어디로 가장 먼저 갈까 고민하다가, 유코가 ‘쇼핑을 가장 좋아한다.’고 썼던 것을 기억해냈다. 아무래도 문화재 같은 것들을 먼저 보여주는 것 보다는 즐거운 분위기에서 긴장을 풀어주는 것이 급선무일 것 같았다. 어디가 좋을까 생각하다가, 외국인들이 쇼핑을 위해 많이 찾는 명동을 떠올렸다.
“일본의 하라주쿠 같은 곳이 있는데, 한 번 가 볼래?”
유코는 자신의 친구들도 한국에 왔을 때 명동에 가 보았다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명동의 거리는 여느 때처럼 북적이고 있었다. 유코는 내 팔을 꼭 잡고 걸었다. 친구들과 왔을 때는 몰랐는데, 유코와 함께 걸으며 살펴보니 여기저기서 일본어와 중국어로 말하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유코도 일본어로 말하는 사람들과 일본어로 된 안내판이 적혀 있는 것들을 보고 신기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옷이나 화장품들을 사며 명동을 활보하는 동안, 유코의 긴장도 많이 풀린 것 같았다.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유코는 명동 거리에서 느껴지는 젊음이 마음에 쏙 든 모양이었다. 호객인들 몇이 유코가 일본인인 것을 알아채고 다가와 말을 걸자 웃는 얼굴로 대답을 하기도 했다. 중국어로 말을 걸었다가도, 유코가 입을 열자마자 일본어로 다시 말을 걸었다. 우연히도 우리가 들어간 음식점의 종업원도 일본인이기에, 이제 유코는 자신감을 조금 되찾은 것 같았다.
정말 외국인들이 많이 오긴 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유코가 웃으며 말을 꺼냈다.
“미주, 여기 사람들은 모두 친절한 것 같아. 나는 한국에 오면 한국어만 써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여기 사람들은 일본어도 잘해. 신기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
일본어와 한국어가 반쯤 섞인 유코의 말을 듣고, 나도 조금 뿌듯해졌다. 예전에 중국으로 여행을 갔을 때, 한국인과 한국어로 쓰인 호객 문구들을 보고 반가웠던 것과 같은 기분일까. 낯선 땅에 와서 혹시나 길을 잃거나 사기를 당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많았는데, 한국인들이 많이 다녀가는 곳이다 보니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중국 상인들도 많았고, 모두 한국인을 친절하게 대해줘서 정말 고마웠던 기억이 났다. 전에는 느끼지 못했었는데, 외국인 관광객들을 가장 많이 배려하는 곳이 바로 명동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명동의 필수 코스, 회오리감자와 노점상 식혜까지 먹은 뒤 숨을 좀 고를 겸 번화가를 벗어나 명동성당으로 향했다. 해가 넘어갈 무렵이라, 명동성당의 멋진 야경을 보여주기에 딱 좋은 시간이었다. 유코는 성당의 규모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건물을 한 바퀴 둘러보고 있자니 여기저기서 아름다운 조명이 켜지기 시작했다.
그 때, 유코가 저 멀리서 한 무리의 불빛이 일렁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봉헌초였다. 유코와 나도 촛불을 하나씩 켜 보았다.
“한국의 밤은 정말 아름다운 것 같아.”
초를 밝히고 돌아서는데, 이번에는 건물 너머로 남산타워가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것들을 보여줄 수 있어 다행이었다. 내가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유코가 먼저 벤치에 걸터앉아 남산타워를 올려다보았다. 미소를 띠고 있는 유코의 옆얼굴을 보며, 나도 따라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