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쉽게 그칠 줄 몰랐다. 딸애가 겨우내 입으라고 옷을 사왔다. 남편 것이랑 내 것 두 개다. 나는 받아들자마자 대뜸 ‘어디꺼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딸애는 비싼 거야, 됏수? 이런다. 비싼 거란다. 하기야 어디꺼냐고 묻는 말에 비싼 거라고 돌아온 대답이 썩 틀린 대답도 아니었다. 손주들을 마치 대단한 선물인양 품에 쥐어주고는 이제 틈만 나면 아이들을 맡기고 저들끼리 하하 호호다. 물론 손주 새끼들 안 예쁜 노인네야 없겠지만 저들 하는 짓이 얄미워 그런다.
남편과 나는 일찍이 정년퇴임을 마치고 그야말로 까마득할 줄 알았던 노년의 시기를 보내고 있다. 조용한 걸음으로 가까운 예배당에 나가 자식들 안녕을 바라고 오는 것 이외에는 특별한 일도 없다. 손주들을 봐줄 때면 꼭 당부하는 말이 있다. 과자 사달라고 해도 사주지 말고 꼭 사달라고 떼쓰면 유기농과자 사 먹여라, 비디오테이프 틀어주지 말고 책 읽게 해라, 당근은 잘 안 먹으니 곱게 다져 티 안 나게 먹여라. 별 유난을 다 떤다고 비웃으며 나는 너 그렇게 안 키웠다고 하면 이를 바드득 갈며 그래서 자기가 이런 거라며 대든다. 그러면서 꼭 한마디를 덧붙인다. 염색 좀 하란다.
“엄마, 제발 염색 좀 할 수 없어? 진짜 할머니 같애.”
“그럼 내가 할머니지 아가씨게? 그리고 너도 곧 늙어 이것아.”
“누가 나는 안 늙는대? 그러니까 곱게 티 안 나게 최대한 안 늙어 보이게 살라는 거지.”
늙으면 늙는 거지 최대한 안 늙어 보이게 늙는 건 또 뭐람. 그리고 염색약 한 번 사다 준 적 없는 것이 매번 말로만이다.
아침부터 전화가 왔다. 딸애다. 딸애의 전화를 받으며 무심코 식탁에 놓인 달력을 보니 오늘이 5월 8일이다. 다른 때 같으면 나가서 밥한 끼 먹고 여느 때보다 두둑한 용돈이 담긴 흰 봉투 하나면 끝이더니 이번엔 무슨 일인지 가족야유회를 가잔다. 내가 억새 보러 가고 싶다고 했다나. 지나간 말로 흘린 적이 있었는데 김 서방이 잊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침부터 김밥이다 유부초밥이다 바리바리 싸왔는데 딸애 가족은 캐릭터 돗자리에 유기농 과자, 유기농 과일이다. 김 서방은 웃으면서 하나 드셔 보라고 권했지만 딸애의 찌릿한 눈총에 됐다고 했다. 어느새 자기 둥지를 틀어 자기 새끼들만 돌보는 자식들을 볼 때면 언제 저렇게 컸나 싶다가도 젊은이들 상대로 피어오르는 질투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산 정상에 끝없이 펼쳐진 억새가 바람에 따라 한들한들 춤을 춘다. 흰색으로 보였다가도 금세 은빛을 띤다. 부스스 소리를 내며 일렁이는 억새를 보니 벌써 가을인가 싶다. 내 나이도 어느새 가을을 맞이했다.
꼿꼿하던 몸과 마음으로 살았던 2, 30대를 지나 점점 세월이 지나고 보니 스쳐 가는 바람에도 몸을 눕히는 60대가 되어버렸다. 손주가 은빛 억새를 보고 할머니 머리랑 똑같다고 깔깔거린다. 딸애는 거보라며 ‘진작 염색 좀 하지’란다.
난 이렇게 흰 아니 은빛 내 머리가 좋다. 늙는다는 것은 서러운 것도 슬픈 것도 아니니까. 그저 지나온 세월에 대한 정당함이라고 생각하니까. 늙음을 애써 감출 필요 뭐가 있을까. 바람에 흔들리듯 세월에 몸을 맡겨 이리저리 몸을 눕힐 줄 아는 지금의 나이가 좋다. 아무렴 좋다.
옛날 어느 마을에 아픈 딸을 위해 명약을 구하러 다니던 남자가 살았습니다. 마을에 소문난 의원들을 찾아 다녔지만 아무도 딸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의원이 없었지요. 그렇게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몸에 좋다는 만병통치약을 구하러 다니던 남자는 온몸에 힘이 빠져 금세라도 주저앉고 싶었지만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딸아이의 걱정에 다시금 발걸음을 재촉하였습니다. 걷고 또 걸어 힘이 빠진 남자는 목이라도 축이려고 한 주막을 들렀습니다. 그런데 그 때 범상치 않은 행색을 한 사내가 홀로 앉아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남자는 말이나 붙여볼 요량으로 옆에 다가가 앉았습니다. 그러자 사내는 남자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했습니다.
“딸아이가 병을 앓은 지 꼬박 두 달이 넘었구먼.”
“아, 아니. 그것을 어찌 알았습니까요?”
사내는 여전히 남자를 쳐다보지도 않고 남자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습니다.
“흐음. 명약을 찾고 있나본데 그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은 없다네. 허나 병을 낫게 할 방도는 있지.”
딸아이의 병을 낫게 할 방도가 있다는 사내의 말에 토끼눈이 된 남자는 사내를 재촉하며 물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으나 딸아이의 병을 고칠 수 있는 명약이 없다 들었습니다.”
“가평으로 가보시게. 그곳에 최고로 높이 자란 잣나무에서 잣을 따다 죽을 쑤어 먹여보게. 그럼 병이 씻은 듯이 날걸세.”
사내의 말 한마디에 남자는 가평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곳에는 몇 그루의 잣나무가 우거져 있었지요. 남자는 사내의 말대로 가장 높이 자란 잣나무를 올랐습니다. 하지만 20m가 족히 넘는 나무에 오르는 일이 마음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겨울이라 눈이 내려 나무는 더없이 미끄러웠지요. 그렇게 몇 번을 나무에서 떨어지고 또 떨어졌으나 오로지 딸을 위해 열심히 잣을 땄습니다. 그러나 위험을 무릅쓰고 얻은 잣은 몇 알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이것만 먹으면 딸의 병이 나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서둘러 산길을 내려오던 남자는 길가에 쓰러진 다람쥐를 발견하였습니다. 겨울이라 먹이를 제대로 먹지 못한 모양이었습니다.
딸의 병을 고치기 위해 딴 잣이었지만 가엾게 떨고 있던 다람쥐가 불쌍하여 잣을 잘게 으깨어 다람쥐에게 먹였습니다. 힘들게 딴 잣 전부를 다람쥐에게 먹이고 터덜터덜 산길을 내려왔습니다.
날이 밝자마자 남자는 어제 잣을 따던 나무를 향해 산길을 올랐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어제 그 잣나무 아래에 잣이 한 움큼 쌓여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놀란 마음에 나무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다람쥐 한 마리가 열심히 나무를 타고 올라가 잣을 입에 물고 내려오는 것이었지요.
자세히 보니 잣을 물고 내려오는 다람쥐가 어제 남자가 살려준 다람쥐였던 것이지요. 다람쥐는 재빨리 나무를 타고 올라가 높이 매달려 있는 잣을 내려다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남자가 서 있는 쪽으로 잣을 밀어주었지요. 얼마나 많이 잣을 따다 주었는지 잣죽을 쑤어 딸아이를 먹여 병이 낫고도 남을 만큼의 양이었지요.
남자는 가평 잣의 놀라움과 겨울철 다람쥐들이 굶주리지 않도록 남은 잣을 잣나무 옆에 심었답니다. 남자가 심어놓은 잣 씨는 무럭무럭 자라나 산림을 이루었고, 지금도 가평에 우거진 잣나무는 맛과 효능이 뛰어나기로 소문이 나있지요.
더 놀라운 것은 지금도 잣을 따기 위해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나무를 타고 올라가 잣송이를 떨어뜨려 수확을 한답니다.
먼 옛날, 동해안 바닷가 마을에 효은이라는 처녀가 살았다. 그녀는 양반집 규수로 일찍 어미를 잃고 홀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성품이 곱고 어질어 집안 노비들에게도 친절하게 대하니 남녀 가릴 것 없이 마을 사람들 모두가 그녀를 예뻐했다.
그러던 어느 날, 효은의 아버지가 옆 마을 아름다운 처자와 결혼을 하였다. 효은의 계모는 성질이 사납고 야박하여 베풀 줄 모르는 욕심쟁이였다. 아버지는 계모의 꼬임에 빠져 밤낮 가리지 않고 술을 마셨고, 계모는 몸치장에 혈안이 되어 가산을 탕진하였다.
몇 년 후, 아버지가 죽자 계모는 집안의 노비들을 팔아넘기고, 효은에게 노비의 옷을 입혀 밤낮으로 집안일을 시켰다. 마음씨가 고운 효은은 군말 없이 집을 청소하고 밥을 해다 바쳤다. 효은은 알뜰하여 어떤 물건도 허투루 버리지 않았다. 모든 가재도구를 아끼고, 늘 닳아 해질 때까지 사용했다.
하루는 효은이 낡은 빗자루로 마당을 쓸다가 가시에 엄지손가락을 찔렸다.
“이런, 빗자루가 못 쓰게 되었구나.”
하얀 손가락에서 떨어진 피는 마당과 빗자루 위에 뚝뚝 떨어졌다. 피가 묻은 물건을 써서는 안 된다는 미신에 따라 효은은 빗자루를 빈 곳간에 넣었다.
오래된 물건에 사람의 피가 묻으면 괴기한 일이 생기는 법. 밤이 되자, 피가 묻은 빗자루에 푸른빛이 돌더니 도깨비로 변하였다. 그곳에는 이미 여러 도깨비가 살고 있었다.
“당신들은 어디서 왔소?”
빗자루 도깨비가 물으니 도깨비들 저마다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아씨가 고운 손 얼어가며 개울에서 빨래할 때 쓰던 방망이요.”
“나는 아씨가 아픈 팔 부여잡고 떡을 칠 때 쓰던 절굿공이요.”
“나는 아궁이 옆에 놓여 아씨 발 등에 불 떨어질까 걱정하던 부지깽이요.”
“나는 아씨의 고운 머리 빗어주던 얼레빗이라오.”
모두 효은의 피가 묻은 물건들이 도깨비로 변한 것이었다. 도깨비들은 저마다 사정이 달랐지만 착한 효은을 걱정하는 마음만은 똑같았다.
“좋소. 오늘부터 우리가 아씨를 도웁시다.”
도깨비들은 밤새 질통에 물을 길어놓고, 깨끗이 집안을 쓸고 닦았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지?”
아침이 되자 효은은 깨끗해진 집안을 둘러보며 어리둥절했다. 도깨비들의 선행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사흘에 한 번꼴로 산 짐승을 잡아다 놓았으며, 밤중에도 아궁이에 불이 꺼지지 않도록 했다. 풍족해진 밥상에 계모가 웬 횡재냐 물었으나, 효은 역시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집은 활기를 되찾았고, 효은의 표정은 나날이 밝아져만 갔다.
“아씨의 표정이 밝아진 것 같아 다행이오. 하지만 손끝에 물 마를 날 없으니 전처럼 모습이 곱지는 않소.”
어느 날, 도깨비들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다가 효은의 방 문 앞에 비단옷과 노리개를 가져다 놓았다. 아침이 되자 효은은 문 앞에 놓인 옷을 보고 감탄하였다.
“곱기도 곱다. 이렇게 빛깔이 고운 옷은 난생처음 보는구나.”
옷을 입은 효은의 모습은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았다. 그 모습을 본 계모가 시기하며 달려왔다.
“요망한 계집. 어디서 이런 물건을 훔친 게냐. 자고 나면 손 쓸 것 없이 온 집안이 깨끗해지고, 먹을 걱정 안 해도 풍족하니. 이제 집안에 너는 필요 없다.”
계모는 옷을 찢고 효은을 동구 밖으로 내쫓았다. 마을에서 쫓겨난 효은은 오갈 데 없어 헤매다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도깨비들은 화가 나 밤마다 심술을 부렸다. 황소를 지붕 위에 올려놓고, 솥뚜껑을 솥 속에 넣어 두었다. 개똥을 퍼다 마당에 쌓아놓고, 질통의 물을 전부 마셔버렸다. 그러자 계모는 기겁하여 집을 두고 줄행랑치다 효은이 죽은 절벽에서 발을 헛디뎌 목숨을 잃었다.
계모가 죽고 나서도 도깨비들의 화는 가라앉지 않았다. 밤이 되면 우물물을 마르게 하고, 파도를 높게 했다. 마을의 쌀을 훔쳐 산에다 버리고, 말려놓은 물고기나 궤를 훔쳐갔다. 그리하여 마을 사람들은 도깨비들의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도깨비 고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자 도깨비 고사는 별신굿이라는 풍어제로 발전했고, 지금도 동해에서는 이 제사를 지내는 곳이 남아있다.
한두 해에 걸쳐 한 번씩은 꼭 떠나는 부산여행이지만, 이번 여행길은 특별하다. 해수욕장에 가는 대신, 해운대와 광안대교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이기대의 해파랑길과 갈맷길을 걸어보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문제가 생겼다. 낮이면 온종일 해수욕을 즐기고 밤이 되면 센텀시티의 찬란한 야경을 보며 술을 마시는 것을 부산 여행의 묘미로 삼던 나였는데, 이번에는 아내가 다른 모임에 가는 바람에 아들이 동행으로 붙어버린 것이다. 모처럼 혼자 떠나는 여행인지라 카메라를 챙겨 들고 여유를 즐겨 볼까 했는데, 다 틀렸다.
그래도 내 아들인데 어쩌겠는가. 아직 어린 아들은 빨리 바닷가에 수영을 하러 가자고 끝도 없이 칭얼거릴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이기대를 걸으며 들려 줄 이야기들을 미리 준비했는데, 이기대를 걸으며 전해들을 수 있었던 이야기들까지 합하니 이야기의 규모가 꽤 크다. 기억 속에 그냥 남겨 두기가 아까워, 그것을 이 자리에 풀어 놓아 보고자 한다.
하나, 이기대의 이기(二妓)란, 두 명의 기생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야기 흐르는 대로’ 걸을 수 있는 곳이라 이기대라며 첫 운을 뗄 생각이었던 내게는 아주 맥 빠지는 내용이었는데, 내 멋대로 해석해 보기는 물 건너갔지만, 이 전설이 꽤나 재미있다.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쳐들어와 이곳에서 승리를 자축하는 연회를 열었는데, 이곳에 불려갔던 기생 두 명이 왜장에게 술을 권하여 취하게 한 후 왜장을 안고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고 한다.
때문에 의로운 기생들의 이야기가 전해오는 곳이라 하여, 의기대(義妓臺)라고 부르던 것이 조금 더 알아듣기 쉬운 이기대로 바뀌었다 한다. 논개에 이어, 이기대에서도 왜장을 안고 투신한 기생들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으니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이곳 어딘가에 이 의로운 기생들의 두 무덤이 숨겨져 있다는 전설도 내려오니, 이 무덤들을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둘, 구천만 년 전에는 공룡도 이 길을 걸었다.
절벽과 절벽 사이를 가로지른 구름다리를 건너가다 보면 커다란 물웅덩이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공룡의 발자국이라고 한다. 무려 구천만 년 전의 백악기에 울트라사우르스라는 이름의 거대한 초식 공룡이 이기대를 걸었던 것이다.
초여름이라 공룡 발자국 안에는 수십 마리의 올챙이들이 살고 있었는데, 공룡 발자국 안에서 자라 개구리까지 된 녀석들을 보고 있자니 새로운 이야기들을 마구 써 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 근처에서 황동이 생산되기도 했다고도 하고, 동굴체험을 할 수 있는 곳도 있다. 몇 년 전 큰 인기를 끌었던 영화 <해운대>에서 이기대라는 이름의 어원까지 속 시원하게 언급된 지금이야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곳이 되었지만, 이 아름다운 곳이 크게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군사지역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캐면 캘수록 과거의 이야기가 흘러나오니, 과연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곳’이라는 별칭이 어울리는 곳이다. 이렇게 숨은 이야기가 많은 지라 길 가다 만난 현지인들은 모두 훌륭한 이야기꾼이다.
셋, 오륙도의 새하얀 섬은 사실 가마우지의 배설물로 덮인 섬이다.
다섯 개의 구름다리를 건너 오륙도가 내다보이는 곳까지 이르렀다. 산책길이라고 하기에는 꽤나 험난한 길이다.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데, 지나가는 사람마다 오륙도의 섬 개수를 세어 보고 있다. 날이 맑아 오늘은 여섯 개의 섬이 모두 잘 보였다.
낚시를 좋아하는 나는 오륙도 인근까지 배를 타고 나가 본 일이 있는데, 아름다운 섬들 중에서도 설산처럼 하얀 굴섬에 매료되었었다. 그런데 ‘섬이 하얀 게 참 예쁘다’는 말을 하자마자 뱃사람 한 명이 웃음을 터뜨리며, ‘저게 다 가마우지의 똥’이라는 말을 했었다. 결과적으로는 이 천연 거름 덕택에 굴섬 주변에 훌륭한 천연 어장이 형성되었지만, 그 때의 충격과 창피함을 어찌 설명할 수 있으랴.
슬쩍 아들의 얼굴을 쳐다보니, 눈이 초롱초롱한 것이 이기대가 퍽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공룡 이야기에서부터 얼굴을 펴기 시작하더니, 가마우지 똥 이야기에 이르러서는 아주 숨이 넘어가도록 웃었던 것이다. 아들의 배에서 꼬르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밥 좀 먹으러 시내로 나갈까?”
“아니, 나 아까 해녀 아줌마가 팔던 거 그거 먹을 거야!”
기특한 일이었다. 나는 아들의 손을 꼭 붙잡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해녀막사 앞의 난장에 멍게가 아주 싱싱하던 것이 떠올라 군침이 꿀꺽 꿀꺽 넘어갔다. 구천만 년 후의 이기대에서는 나와 우리 아들의 발자국이 발견되기를 바라며, 짧은 글을 마친다.
주말의 밤은 언제나 시끌시끌하다. 극장 앞은 아직도 오늘 공연에 대해 찬사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극장 안으로 들어와 앉았다. 긴장과 환호성, 불빛이 가득한 아름다운 극장의 모습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만, 사람들이 모두 돌아가고 난 뒤의 조용한 극장의 모습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입장권을 비롯한 자질구레한 쓰레기들이 나뒹구는 가운데서, 나는 재빨리 다음 공연을 위해 연필을 놀렸다.
“윤 작가님, 벌써 또 시작하셨어. 하여튼 못 말린다니까.”
무대 철거를 위해 분주히 움직이던 스탭들 가운데서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나도 그 쪽을 보고 씩 웃어 주었다.
내가 이곳에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 지도 어느 새 삼 년.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여 순수 예술을 하겠다고 큰소리를 치던 내 기가 꺾인 지도 삼 년이 지났다.
삼 년 전, 나는 내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예술을 하던 꽉 막힌 예술인들 중 한 명이었다. 나는 내 손끝에서 탄생한 시나리오가 시처럼 아름답고 고상한 언어들로 가득 차 있길 바랐다. 정작 요즘엔 시인들도 그런 아집에 갇힌 언어들을 사용하기를 거부한다는 것을 알게 된 지도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여하튼, 나는 내가 배워 온 모든 것들이 아까워 견딜 수가 없었다. 어깨 너머로 배운 철학이나 심리학 따위로 내 시나리오의 절반 이상을 채워야 직성이 풀렸고, 어쩌다 한 번씩 내 시나리오로 공연을 올리게 되면 무지한 관중들에 대한 분노로 밤새 술을 마셔야 했다.
“연극에 대해, 시나리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내 공연을 보러 오니 당연히 반응이 시원찮을 수밖에 없지!”
연극계에서 꽤나 입지를 굳힌 선배들이 조언이랍시고 내 놓는 대중성에 대한 문제는 도무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네가 관객과 함께 호흡하는 법을 조금만 배운다면 이렇게 힘들어하지 않을 텐데.”
그런 말을 들으면 나는 선배들도 똑같다며 테이블을 뒤엎기 십상이었다.
그러던 나를 바꾼 것이 바로 이 극장에서 우연히 보게 된 마임 공연이었다. 선배들이 하나같이 말하던 관객과의 호흡. 그 날도 모니터의 하얗게 빈 화면 위에서 홀로 깜빡이는 커서만을 바라보다가, 내게는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그 호흡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찾은 극장이 바로 이 곳. 작은 극장 돌체였다.
처음 보는 마임 공연은 내게 있어 충격 그 자체였다. 무대 위의 피에로와 어릿광대들이 펼치는 공연은 내가 그렇게 집착해 왔던 언어의 아름다움을 완전히 무시한 공연이었던 것이다. 한껏 무게를 잡은 채 절규하거나 눈물을 흘리는 비극의 주인공들 대신에 외발자전거를 타거나 저글링을 하고, 마술을 선보이는 광대들로 채워진 무대 앞에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게다가 공연에 대한 예의를 갖추어 침묵을 지켜야 할 관객들은 여기저기서 손뼉을 치며 깔깔대며 웃고 있었다.
뭐 이런 공연이 다 있나 싶어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찰나, 풍선을 불던 어릿광대 하나가 다가와 내게 풍선으로 만든 꽃을 하나 건네주었다. 아이들이 부러움에 가득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어찌할 줄을 모르고 서 있던 나를 내버려둔 채 어릿광대는 무대로 다시 돌아가 버렸다. 그게 이 극장과 나의 첫 번째 이야기다.
“아니, 어떻게 그런 곳이 다 있어?”
분노가 섞여 있는 내 물음에 선배가 웃음을 터뜨렸다.
“거긴 원래 장애인이나 다문화 가정이나, 아니면 청소년들이 참여할 수 있는 연극도 많이 올라 와. 인천 클라운 마임 축제도 거기서 열리고.”
“대체 비전문가들을 왜 무대에 올려? 전문 연극인들만으로도 어려운데.”
내 물음에 선배는 네가 처음에 왜 글을 쓰겠다고 다짐했는지를 떠올려 보라고 대답했다. 그 순간, 나는 기이한 풍경을 보게 되었다. 시나리오를 쓰는 대여섯 명의 고정 멤버가 한 달에 한두 번씩 모이는 그 술자리에서, 나를 뺀 모두가 아주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오직 나만이 세상의 모든 걱정 근심을 다 지고 있는 양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나는 내가 쓴 시나리오 한 편을 들고 이 극장을 다시 찾았다. 그 동안 써 온 수십 개의 시나리오를 모두 버렸기에, 나는 이것을 내 첫 번째 시나리오라고 소개했었다.
내 첫 시나리오로 공연이 올라가던 날, 나는 이 극장을 처음 찾았던 날처럼 관객 틈에 앉아 있었다. 이미 정해져 있는 무대 위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동안, 무대와 관객들이 함께 만드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태어나고 있었다.
물이 있는 곳에는 사람들이 모이기 마련이고 사람들이 모이는 곳엔 언제나 이야기가 피어난다. 어느 나라든 강은 중요한 물류 운송의 수단이 되었고 강을 중심으로 사람들은 그 당시 수도인 한양으로 몰려들며 강 주변 나루에 상권을 만들게 된다.
마포나루는 조선의 시전 상인들이 물자를 교역하는 중요수단이었으며 조선의 모든 장사꾼들이 한번쯤 지나칠 수밖에 없는 공간이 되었다.
“주모, 여기 술상하나.”
“누군가 했더니 김씨구먼, 외상은 안 돼요. 오늘은 내 돈 받을 것이니 그리 아시오.”
“어허, 왜 그러오? 내 오늘은 돈 내고 먹는 것이니 걱정 말고 상이나 빨리 가져오란 말이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소? 오늘은 장사가 잘 되었나 보지요?”
“그럼, 잘 되고말고. 모처럼 장사수완이 좋았지. 암.”
당시 마포나루에는 여러 장사꾼들이 모여 상권을 이루었지만 그 중에서도 새우젓이 제일이었다. 당시 서울사람들은 겨울이 되기 전 김장을 담그기 위한 새우젓을 사러 모여들었고 마포나루에서 새우젓을 사가면 성공한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로 마포나루에는 새우젓의 짙은 향이 머물곤 했다.
김씨가 마포나루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것도 이 새우젓 때문이었다. 마포나루의 아지매들이라 하면 다들 김씨의 새우젓을 맛보고 사가기 위해 십리 밖까지 줄을 선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로 김씨의 장사수완은 날로 좋아졌다.
“어이, 자네 김씨 소식 들었는가?”
“들었지, 들었고말고. 그래서 사람팔자 한치 앞도 모르는 거라 그러지 않나. 김씨가 저리 성공할 줄 알았겠어?”
“누가 아니래? 비싼 비단 저고리 팔다 내 신세 다 가겠소. 나도 김씨한테 장사나 좀 배워볼까?”
“그러면 뭐하누, 아직 상투를 못 틀었는데.”
“아, 조선팔도 김씨 새우젓 장사 소식이 파다한데, 이제 예쁜 색시 고르는 일만 남았지 뭐요.”
주막을 오가는 사람들 사이로 김씨의 소식은 이리저리 퍼져갔다. 하지만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처럼 김씨에게 시집을 오겠다는 처자들은 많았지만 김씨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선뜻 어떤 아낙과 혼인을 하겠다는 이야기가 나돌지는 않았다. 지나가는 이야기로는 마포나루에서 크게 어물전을 하는 거상의 여동생을 흠모하고 있고 그 처자도 김씨가 맘에 드는 모양이나 어물전 오씨가 김씨를 허락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만 들릴 뿐이었다.
김씨도 마포나루에서 크게 자리 잡은 사람이었지만 어물전 오씨를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다. 오씨는 마포나루 상인 중 제일가는 장사꾼으로 마포나루 상인들을 움직이는 힘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가 가진 선박도 여러척이었고 그의 말에 마포나루 상권이 들썩일 정도였다. 오씨도 김씨의 장사를 눈여겨보고 있었을 터, 침착하고 진중한 성격의 오씨는 아직 김씨를 인정해주지 않았다.
사실 오씨가 김씨를 탐탁지 않아 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김씨가 새우젓 장사를 하면서 상권을 확보하자 점점 오씨가 판매하는 어물전과 겹치는 품목들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오씨에게는 단골손님들이 많았기에 큰 피해가 있지는 않았지만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김씨는 무슨 수를 내어야 했다. 언제까지 오씨의 허락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김씨는 며칠 뒤 마포나루에서 큰 잔치가 열릴 것을 알고 그 때를 노리기로 했다. 오씨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마을의 큰 잔치가 열리고 마포나루에 모인 사람들은 거의 평소 때보다 곱절이나 많았다. 오늘 장사만 잘 하면 크게 한 몫 챙길 수 있었기 때문에 상인들도 좀처럼 바삐 몸을 움직였다. 그런데 이게 무슨 영문인지 시간이 지나도 김씨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오씨도 내심 김씨가 신경 쓰였는지 자꾸만 김씨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날이 점차 어두워지고 상인들이 한두 명씩 짐을 꾸리고 있을 때 김씨의 모습이 나타났다. 주막에서 속편하게 술을 마시고 있다는 것이다. 오씨가 김씨의 옆에 털썩 앉았다.
“아니, 김씨 자네 오늘이 얼마나 중요한 날인지 모르고 여기 이렇게 태평하게 술을 마시고 있는가?”
“어물전 장사는 잘 되었나 모르겠습니다.”
“나야 늘 그렇지만 자네는 단골도 만들고 하기 좋은 날인데. 장사꾼 마음이 글러먹은 건가?”
“저를 기다리고 계셨소? 오늘 저는 돈보다 더 귀한 걸 얻었지요. 바로 형님의 장사를 눈여겨보았지요. 어떻게 장사를 하나, 단골은 누구인가.”
“아니 자네. 허허.”
그렇게 오씨는 김씨를 허락하게 되고 마포나루에는 크게 두 개의 상권으로 나뉘게 된다. 아직도 마포나루에는 김씨의 새우젓 냄새가 희미하게 풍긴다는 풍문이 들려온다.
여자를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보내고 남자는 한참을 그 시간에 멈춰있었다. 낮인지 밤인지 문 밖에 신문은 켜켜이 쌓여만 갔다. 술로 하루를 시작하고 또 술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남자가 마시는 것이 술인지 눈물인지 모를 만큼 슬픔을 잊기 위해 슬픔을 들이켰다. 얼마나 그 시간에 갇혀 있었던 건지 옆집 사는 사람이 쌓여있는 신문과 상해버린 우유들을 보고 초인종을 몇 번 누르고 간 적이 있다. 인기척을 낼 마음의 여유가 없던 남자는 그냥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그렇게 몇 차례 경비 아저씨와 옆집 아주머니가 남자의 집 앞을 다녀간 뒤로 남자의 근황을 염려하는 사람은 없었다.
남자가 여자를 처음 본 것은 병원에서였다. 대학병원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동네에서는 꽤 큰 크기의 종합병원에 근무하던 여자의 직업은 간호사였다.
오토바이를 타다 균형을 잃고 넘어지면서 무릎을 크게 다친 남자는 여자가 근무하는 종합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정해진 시간이 되면 실로 꿰맨 무릎에 소독을 하러 여자가 남자의 병실에 찾아왔다. 하얀 얼굴이라 그런지 단정한 간호사복이 잘 어울리는 여자는 순백의 천사처럼 보였다. 남자의 상처를 소독할 때면 마치 엄마처럼 상처부위를 호호 불어가며 소독약을 발랐다.
남자의 생활은 꽤 거칠었다. 어울리는 사람들은 험악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생활도 거의 해가 저문 밤에서야 시작되었다. 그런 그를 변화시킨 것도 여자였다. 사랑을 시작하게 되면서 거칠었던 생활도 점차 안정을 찾고 특별할 것 없이 잠잠하게 사랑을 키워나갔다.
그날도 어김없이 여자를 병원에 데려다 주는 길이었다. 매일같이 여자를 데려다 주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날따라 꺼림칙한 느낌에 잠깐 짬을 내어 여자를 데려다 주었던 것이다.
악. 짧은 비명과 함께 여자가 붉은 피를 쏟으며 자리에 쓰러졌다. 종종 어지럽다고 했었는데 그저 과로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여긴 여자의 몸이 병으로 물들어가고 있는 줄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렇게 여자는 남자의 곁을 떠났다.
실로 오랜만에 남자의 집 앞에 인기척이 들렸다. 남자는 여전히 문 밖을 신경 쓰지 않았으나 강제적으로 문을 따는 소리가 들렸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철컥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집 주인의 허락도 없이 현관문은 스르륵하고 열렸다.
“아직도 이러고 있는 거야? 연락을 해도 답이 없더니만.”
남자의 상황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친구의 방문 아니 무단침입이었다. 남자는 그 와중에 원래 집 주인 허락 없이 문 열어주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생각했다.
“가. 너랑 실랑이 할 힘도 없어.”
“어후, 술 냄새.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건데. 뭐 이런 말 하기 뭐하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 할 것 아니야. 밥이라도 챙겨먹어야지 이 술병들 좀 봐.”
“만사 다 귀찮으니까 가라고.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알아서 하긴, 너 이렇게 사는 거 하늘에서 보고 좋아 할 것 같냐? 이젠 충분해 너도 돌아와야지.”
남자의 어깨가 들썩였다. 소리도 채 새어나오지 않은 울음이었다. 아주 작은 흐느낌으로 남자는 슬픔을 삼켰다. 남자는 여자가 이렇게 아팠던 것이 모두 다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았다.
남자의 슬픔을 바라보던 친구는 남자를 억지로 차에 태웠다. 그리고는 회산백련지에 남자를 데려다 놓았다.
“자. 이제 네 모든 슬픔 여기다 다 남기고 가. 그분도 편하게 보내주고. 이젠 편하게 보내줄 때 된 것 같다.”
하얗게 핀 연꽃이 꼭 그녀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담담한 눈빛으로 넓게 펼쳐진 백련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그녀를 조금씩 놓았다.
넓게 펼쳐진 저수지에 유독 하얗게 핀 백련을 향해 마지막 인사를 했다. 이제는 놓아 보겠다고. 희고 아름다웠던 당신을 잊지는 않겠지만 더 이상 슬퍼하지 않겠다며.
아버지의 산사랑은 끝이 없었다. 아버지에게 산에 가지 말라는 것은 집에서 박제인형처럼 지내라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바람만 쌩하고 불어도 엄마는 산이 위험하다며 아빠를 말리려 들었고 아빠는 좁은 포위망을 뚫고 나가는 고양이처럼 또 산으로 가셨다.
엄마는 아빠가 아무래도 산에 우리가 모르는 좋은 것을 숨겨두었나 보다고 혀를 끌끌 찼지만 아빠가 왜 이토록 산에 매달리는지 알 수 있었다.
아빠는 종종 내게 할아버지 이야기를 해주셨다. 아빠가 어렸을 적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꽤 큰 인삼밭에서 농사를 지으셨다고 했다. 그런데 해마다 인삼도둑 때문에 골머리를 앓으셨다는 것이다. 애지중지하던 인삼을 어떤 놈이 훔쳐갔는지 걸리기만 하면 온몸을 몽둥이로 흠씬 두들겨 줄 것이라며 씩씩대셨다고 했다. 그날 아침이 되었을 때도 어김없이 인삼 한 뿌리가 없었다. 이상하게도 꼭 한 뿌리씩만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고 마음먹은 할아버지는 그날 조그만 오두막에서 꼼짝없이 인삼도둑을 기다리고 있었다.
날은 점점 어두워져 가고 이상한 짐승의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던 할아버지는 무서움에 덜덜 떨면서도 인삼도둑을 잡고자 기다란 몽둥이를 들고 꼭꼭 숨어있었다. 그런데 그때 자박자박 거리는 걸음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졸음이 확 깨었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귀를 쫑긋 세웠다.
‘자박자박 자박자박’ 사람의 소리인지 짐승의 소리인지 구별이 잘 되지 않았던 할아버지는 오두막에서 내려와 냅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진했다.
“잡았다 요놈!”
“악!”
깜깜한 어둠 속 사정없이 내리친 몽둥이를 온몸으로 받은 건 다름 아닌 아버지였다. 그렇게 잡고 싶었던 인삼도둑이 짐승도 아닌 다른 사람도 아닌 아들이었다니.
불빛을 비춰보니 아버지는 그만 정신을 잃었고 이마에서는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에구머니나 하는 소리와 함께 할아버지도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고 아버지를 둘러업고 집으로 돌아온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 자초지종을 물었다. 한참 뜸을 들인 아버지는 할아버지께 사실대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것아, 그게 얼마짜린데 도대체 그동안 그걸 다 어디에 빼돌린겨? 엉?”
“아부지, 잘못했어요. 빼돌리려고 빼돌린 것은 아니고 다 좋은 곳에 썼다니까요.”
“이놈이! 바른대로 말 못해? 몽둥이찜질 한 번 더 당해야 말할 것이여?”
“아아, 아부지. 실은 저 윗동네 민자네 어무니가 많이 아프다 해서 내 몇 개 가져다준 것밖에 없다니까요.”
“뭐? 민자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양반네 가져다 바쳤다 이 말이지?”
아버지는 예나 지금이나 엄마를 생각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나 보다. 사실 우리 엄마 이름이 민자고 엄마는 아빠의 첫사랑이다. 첫사랑을 위해 간 큰 도둑이 되기로 했던 어린 소년.
아빠가 요즘 산에 다니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바로 우리 할아버지 때문이다.
그 옛날 우리 아빠가 엄마를 위해 인삼도둑이 되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할아버지를 위한 거짓말도둑이 되기로 한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도둑이 될 수 있다는 것. 아버지는 오늘도 함박웃음을 띠며 산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