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눈에 오뚝한 코. 검은 머리에 흰 피부를 가진 내 이름은 레이나이다. 아빠는 한국계 독일 사람이었고 엄마는 한국 사람이다. 나는 아빠를 본 적은 없다. 그렇지만 아빠가 있다. 새아빠. 새아빠는 재미교포 2세다.
엄마는 이국적인 취향을 가졌나보다.
어렸을 때 나는 누구보다 애국가를 힘차게 불렀고 누구보다 빨리 외웠다. 조회시간에 국기에 대한 경례도 열심히 했다. 그래서 운동회 날 개회식에 대표로 조회대에 올라 애국가 제창을 하기도 했다. 나는 내가 노래를 잘 불러서 그런 줄 알았으나 나중에 알기로는 신선한 문화적 느낌에서랄까 그래서 나를 쓴 모양이었다.
새아빠는 내게 친절하고 상냥하다. 항상 나를 존중해 주었고 내 앞에서 엄마와의 애정표현도 잘 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난 새아빠가 엄마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지금에 와서 하는 말이지만 엄마는 내가 친아빠에 대해 궁금해 하는지 안 궁금해 하는지도 묻지 않았다. 돌아가셨는지 일찍이 이혼을 하신건지조차도 모르고 지냈으니까. 내가 먼저 물어봤어야 하나 아니면 엄마가 먼저 말해줬어야 하나. 이건 마치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묻는 것과 같을 것이다.
학교에서는 다들 내가 우리나라 말을 능숙하게 하는 것에 대해 신기해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보고 바보 같다고 생각했으나 아주 이해를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마치 외국인이 영어보다 한국말을 더 잘하는 것같이 느껴졌을 테니까.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일 년에 한 번씩 남해로 나를 데려갔었다. 그곳에는 공교롭게도 미국마을 그리고 독일마을이 있었다.
그곳에는 아빠를 닮은 사람도 새아빠를 닮은 사람도 많았고 나는 그들속에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엄마는 내가 열세 살이 되던 날 처음으로 친아빠 이야기를 해주었다. 친아빠는 참 멋있는 사람이었다고 했고 특히 오뚝한 코가 제일 멋있었다고 했다. 내가 아빠를 닮아서 다행이라고 하면서.
엄마는 나중에 내가 다 자라고 나면 이곳에 내려와 살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그러면 나는 짓궂게 미국마을에서 살 것인지 독일마을에서 살 것인지를 물었다. 엄마는 내 콧잔등을 가볍게 치며 다랭이 마을에서 농사지으면서 살겠다고 하기도 했다. 거짓말.
어렸을 적 나는 엄마와 외할머니가 싸우는 걸 몰래 엿본 기억이 있다. 할머니가 엄마에게 못된 소리를 하기에 엄마가 무엇을 잘못했나보다 생각을 하긴 했으나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저 친아빠가 아직 돌아가신 건 아닌가 보다 라는 일종의 정보만 얻게 되었을 뿐이었다.
그 정보를 듣고 난 후에도 나는 엄마에게 친아빠에 대한 유무를 확인하지 않았다. 친자식이 아빠를 궁금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음에도 나는 그것이 마치 엄마를 힘들게 하는 못된 짓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아빠라는 단어에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처럼 쉽게 내뱉지 못하며 자라온 것도 있다. 그래서 인지 아니면 엄마가 다시 만난 사람도 외국인이어서 그런지 나는 아빠라는 단어에 집착하지 않는 새아빠가 고마웠다.
나는 사실 엄마보다 새아빠와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나눴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던 내게 새아빠는 아빠가 보고 싶지 않느냐고 먼저 물었다. 나는 그저 새아빠 얼굴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던 기억이 난다. 보고 싶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보고 싶지 않다고 해야 할까.
나는 엄마가 아빠와 왜 헤어졌는지 궁금했다. 언젠가 아빠를 만나면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어디에 계신지 내가 만나볼 수 있는지 조차도 모르는 아빠에게.
내가 아빠에 대한 정보를 아는 것이 독일 사람이고 코가 오똑하며 예쁘다는 것뿐이었다.
나는 가끔 엄마 몰래 혼자 남해를 찾아오곤 한다. 독일 마을에 내가 알지 못하는 우리 아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흰 벽에 주황색 지붕을 한 어느 따뜻해 보이는 집에 나와 닮은 오뚝한 코를 가진 독일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언젠가 나와 닮은 외국 사람을 만나게 되면 아주 반가운 얼굴을 하고 손을 흔들어 줄 것이다. 이렇게 예쁘게 잘 자라고 있다고.
차마 그리움을 말로 다 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사람들은 의례적으로 어떤 장소를 찾아가곤 한다. 그곳에서 보고 싶은 사람의 흔적을 더듬어보기도 하고 음성을 떠올리며 추억의 끝을 걸어보곤 한다. 항상 후회는 무언가 지나고 난 후에 스며드는 것이라 했던가. 준서는 문득 부모님을 만나러 그곳에 간다.
그곳은 늘 조용했다. 먼발치에서 동그랗고 작은 무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약간 허무하기도 했다. 두 분이 나란히 사이좋게 누워계시는 곳이지만 준서의 눈에는 잔디가 무성한 작은 언덕으로 보였으니 말이다.
맨손으로 무덤가에 자란 잡초를 몇 개 뜯으며 말했다.
“어머니 아버지 저 왔어요. 저 준서 왔어요.”
혼자서 이야기 하는 것이 어색한 것인지 듣는 사람이 눈앞에 보이지 않아서인지 준서는 퍽 어색해했다. 마치 연극무대에서 독백을 하는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준서는 부모님이 살아계셨을 때 부모님과 제법 자주 마찰을 빚었다. 그래서일까 준서는 꽤 긴 방황을 했고 준서의 부모님도 많이 지쳐있었다. 외아들이라 오냐오냐 곱게만 자랐을 것 같다는 다른 사람의 시선과는 다르게 준서의 부모님은 꽤 엄하셨다. 교수였던 아버지는 아들의 방황이나 조금의 일탈도 용납하지 않으셨고 그럴수록 준서는 더 엇나가기만 했다. 아버지의 기대에 못 미친다는 생각과 어머니의 방관은 준서를 더욱 힘들게 했다.
준서는 차라리 이럴 거면 부모님이 없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물론 그런 생각을 품었다는 것이 몇 년 후 뼈저리게 아픈 말로 남을 줄은 준서도 몰랐을 것이다.
종이컵에 소주를 조금 따르고 절을 올렸다.
“저 곧 결혼해요. 듣고 계시죠? 좋은 사람이에요. 저한테도 잘해주고 마음도 넓어요. 저 이런 유별난 성격 다 받아주는 사람이면 어머니 아버지도 이 여자 인정해주실 거라 믿어요. 부모님 없이 결혼한다고 생각하니까 문득 서글퍼져서 이렇게 찾아왔어요.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이렇게 여기 누워계시니까 정말이지 그 때는 바보 같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도 결혼을 하고 아이도 태어나면 부모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까요?
사실 전 아버지처럼은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늘 어머니를 외롭게 만들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이렇게 옆에 나란히 누워 손 잡아주고 계시죠?”
준서는 부모님이 가지런히 누워계신 이곳을 자주 찾지 않았었다. 옛날에는 삼년상이라고 해서 부모가 돌아가신 후 3년 동안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부모에 대한 효를 다하고자 여막에 거처하며 아침저녁으로 식사를 올리고 호랑이한테 잡혀가서도 묘성을 쌓기 전까지 죽을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하였다던데 준서는 어쩐지 이곳이 낯설었다.
이렇게 부모님께 푸념 아닌 푸념을 늘어놓는 것도 새삼 놀라울 일이었다.
곧 결혼을 하고 부모가 될 준비를 해서일까 준서는 새삼 부모님의 곁이 그리웠다. 호통을 쳐도 쓴 소리를 해도 좋으니 곁에만 함께 있어주기를 바랐다.
산소에 오기 전 준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모님께 올리는 편지를 썼다. 어버이날에도 써보지 않았던 서툰 편지로 준서는 부모님께 편지를 썼다.
그리고 산소 앞에 조심히 편지를 놓아두었다. 썼다 지웠다를 반복한 편지였지만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진실 된 편지였다.
편지를 놓아두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왠지 부모님과 깊은 대화를 나누고 온 기분이었다. 그리고 낯설 것만 같았던 이 길이 낯설지 않았던 것처럼 다시 이곳을 찾고 부모님을 뵐 때도 낯설지 않을 것이다.
6년째 열애중이라니. 꼬박 6년이라는 시간을 한 남자만 바라보고 살았다는 사실이 참으로 대견하지는 순간이다. 말이 6년이지 꽃다운 시절의 기억이 온통 한 남자와의 기억으로 빼곡하다는 것이다. 사진첩 빼곡히 둘이 찍은 사진들이고 그 속에는 대한민국 구석구석 안 가본 곳이 없었다. 친구들은 저 부부는 언제 갈라서냐고 농담 삼아 이야기 하지만 그것도 다 풍경처럼 지나온 시간들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리라.
2월 14일 남자친구의 생일이자 밸런타인데이인 겹경사의 날. 너는 매년 불공평하다고 입을 삐쭉 내밀었다. 남자친구의 생일선물과 동시에 초콜릿을 만들어 주기 위한 장을 보러 나섰다.
“야, 너네는 아직도 이런 거 주고받니? 이젠 이런 것쯤 그냥 넘어가도 될 때 아니야? 무슨 사귄지 100일, 200일 된 것도 아닌데.”
“무슨 소리, 오래 사귀면 뭐 연애감정도 없는 줄 알아? 우리도 다 이런 거 주고받으면서 하하 호호 하거든?”
최고로 예쁜 모습에 초콜릿이랑 선물까지 준비했다. 함께 지나온 시간들이 늘어날수록 차곡차곡 쌓이는 기억들이 사진첩에 남은 사진들처럼 선명했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를 만큼 많이 성장해있는 모습에 가끔은 깜짝 놀라기도 했다.
지금은 서로의 얼굴을 보고 눈을 맞추고 손을 잡으면 따뜻하고 편했다. 가끔은 풋풋했던 대학시절 이름만 불러도 얼굴이 빨개지던 때가 그리울 때도 있다.
그렇게 꼬박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드디어 너에게서 연락이 왔다. 넌 언제나 특별한 날 우리가 갈 곳을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
“나 오늘 어때? 예뻐? 이거 네가 만난 지 4년 될 때 사준 원피스잖아. 어때?”
“여전히 예뻐.”
남자친구는 이렇게 참 세심했다. 그냥 예쁘다고 했어도 물론 좋았겠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예쁘다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늦은 시간에 만나자고 한 거야? 난 오늘 하루 종일 만나서 놀려고 시간 다 비워놓고 기다렸는데. 혹시 나 몰래 어마어마한 이벤트라도 준비한 거 아니야?”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는데 차가 세워진 곳에는 정말 화려한 동화 속 세상처럼 온통 반짝이는 불빛이 가득했다.
무지개, 하트, 나무들은 화려한 불빛으로 환하게 빛났다. 잠시 아무 말도 없이 눈앞에 펼쳐진 풍경들을 바라보았다.
“멋져. 정말 아름답다.”
불빛으로 물든 놀이공원 곳곳에는 지난 6년간 함께 했던 시간을 꺼내 보여주기라도 하듯 둘이 찍은 사진들이 예쁘게 놓여있었다. 만나고 처음 싸웠다가 화해한 날, 남자친구가 말없이 집 앞에서 나를 기다려주던 날, 처음으로 공포영화보고 펑펑 울던 날, 내가 준 선물 받고 좋아하는 네 모습 등 평범하다고 느꼈던 하루하루가 특별한 공간에 모여 있으니 지난 6년이라는 시간이 덩달아 특별해지는 느낌이었다.
남자친구 손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불빛으로 가득한 회전목마 앞이었다.
“우리 결혼하자. 네 말대로 우리 벌써 6년이라는 시간동안 함께 지내왔잖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주변을 밝히는 불빛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꺼져있던 불빛이 다시금 환한 빛을 받는 듯했다.
남자는 장미꽃 한 다발을 내밀었다.
“반지는 내가 알아서 찾으면 되는 건가?”
손을 맞잡으며 힘차게 돌아가는 회전목마를 바라보며 웃음 지었다.
방학 끝물, 다음 학기가 마지막인 친구들끼리 모여 특별한 기억을 만드는 계획을 세우는 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대학생으로 맞는 마지막 방학인 만큼 정말 특별한 계획이 필요했는데, 바다도 계곡도 지겨울 정도로 다녀왔기에 마땅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야, 정말 이제 해외로 나가지 않는 이상 할 게 없는데?”
맞는 말이었다. 우리처럼 많이 놀러 다닌 대학생들도 없을 것이다. 전국 각지의 명소란 명소, 축제란 축제는 다 돌아다니는 우리들 네 명에게는 이미 국문과 유랑단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
우리의 고민은 하루 종일 이어졌다. 마땅히 끌리는 곳이 없어서 애를 먹고 있는데 한 명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아, 하나 있다. 우리가 안 해 본 거. 자전거 여행은 한 번도 안 해 봤잖아.”
“자전거 여행? 그건 제대로 가려면 한 일주일 잡고 가야 될 텐데, 우리한테는 이번 주말 밖에 시간이 없잖아.”
게다가 학교 근처에서 모두 자취를 하고 있는 터라 자전거를 소지한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자전거라는 말에 다들 귀가 솔깃해졌다. 초등학교나 중학교 때의 접이식 자전거 이후로, 자전거를 타 본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자전거 여행은 제치고서라도, 자전거를 빌려서 다녀올 수 있는 곳이 있는지를 찾아내는 데에 열을 올렸다.
그렇게 고민한 결과 선택한 곳이 소래습지생태공원이었다. 폐염전과 염전 저수지, 그리고 풍차를 함께 볼 수 있는 자전거길이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하고 싶은 일을 바로 실행할 수 있다는 것이 대학생의 장점이라고 생각하는 우리들은 행동 개시를 서둘렀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주말은 정말 맑았다. 너무 오랜만에 자전거를 타서 그런지 처음에는 중심을 잡기도 힘들어하는 친구도 있었는데, 몇 분 지나지 않아 네 명 모두 신나게 소래길을 달릴 수 있게 되었다.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된 길이라더니, 볼거리가 많았다.
넓은 들판 위에 빨간 풍차 세 대가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을 보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전거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다 큰 청년 넷이서 풍차 앞에서 포즈를 잡고 있는 모습이 우리 스스로도 우스워 한참을 웃었다. 커플 단위로 사진을 찍으러 나온 사람들도 많았고, 체험학습을 나온 것 같은 어린 애들의 모습도 꽤 많이 보였다. 염전에 파란 하늘이 그대로 비치는 모습을 보았을 때에는 다들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난 사실 여기 걸어서는 몇 번 와 봤는데, 걸을 때랑은 기분이 완전히 다르네.”
“맞아. 보이는 게 완전히 다른데?”
정말이었다. 나도 새내기 때 즈음에 혼자 소래길을 걸으러 나와 본 적이 있었는데, 자전거를 타고 지나는 소래길은 또 느낌이 달랐다. 걸을 때에는 꽃 하나, 풀 하나가 다 특별하게 보였는데, 자전거를 타고 지나니 그 꽃 하나와 풀 하나가 포함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더 넓게, 더 멀리 볼 수 있게 된 것 같은 기분에 왠지 뿌듯해졌다. 좁은 시선으로 보는 풍경도 아름답지만, 넓은 시선으로 보는 풍경도 특별했다.
한참을 달리다보니 다들 말이 없어졌다. 아마 다들 머리가 복잡할 것이다. 사실 어디론가 떠나는 일에 대해 우리의 마음이 급해진 것은, 앞으로 이렇게 추억을 만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압박감 때문일 것이었다.
불과 일 년 전까지만 해도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내는 데에만 열중하던 우리들이었는데 이제는 어느 새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말은 안 하지만 다들 졸업 후에 무엇을 하며 먹고 살 것인가에 대해 고민이 많았고, 이미 고시나 토익 준비 때문에 평소에는 집 밖으로 잘 나오지 못하는 친구들도 몇 있었다.
부인교에 걸린 구름 앞에서 우리는 하나같이 멈춰 섰다. 때마침 패러 글라이드 하나가 바람을 타고 미끄러져왔다. 파란 하늘 위에 노란 패러 글라이드가 미끄러지는 모습에 모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문득, 풍차 근처에서 연을 날리고 있던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우리들 모두 얼마 지나지 않아 연에 꿈을 매달게 될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 도중에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한 마디가 흘러 나왔다.
“딱 오 년 뒤에, 다들 남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살고 여기 다시 오자.”
어울리지 않게 웬 진지한 말이냐며 빈축을 샀지만, 친구들 모두 멋쩍게 웃는다. 손을 모아 파이팅을 외치고 돌아오는 길, 풍경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검은 그림자가 걷히고 난 그 어느 날부턴가 조용하던 마을이 시끌시끌한 소리로 가득차기 시작했어요. 그것은 다름 아닌 태안에 해수욕장들끼리 서로 자기가 더 멋있는 해수욕장이라며 싸우는 소리였지요. 해수욕장들끼리 싸우는 소리에 할미바위가 귀를 틀어막으며 말했습니다.
“아이고, 머리야. 세상이 어찌 되려고 이러는 고.”
그 중 유일하게 싸움에 끼지 않은 해수욕장이 바로 할미바위와 할아비 바위가 있는 꽃지 해수욕장이었습니다. 그래서 해수욕장들은 꽃지 해수욕장에 있는 할미바위와 할아비바위를 찾아가 누가 가장 멋있는 해수욕장인지 판결을 내 달라고 물으러 갔습니다.
그중 가장먼저 만리포 해수욕장이 어깨에 힘을 잔득 주고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할미바위, 할아비바위님! 태안에서 제일가는 해수욕장이라면 당연히 제가 아니겠어요? 저는 서해안에서 제일 멋있기로 3위 안에 꼽힌다고요! 그뿐인 줄 아세요? 사람들이 저를 찾으면 똑딱선 기적소리~ 만리포라 내 사랑. 이렇게 노래까지 흥얼거린다니까요!”
그러자 몽산포 해수욕장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습니다.
“허, 저는 아주 울창한 송림을 가지고 있어요. 몽산포 송림은 국내 최강으로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데, 당연히 제가 제일 으뜸이죠. 게다가 나를 찾는 사람들은 맛조개를 잡는 재미까지 있다고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안 그래요?”
머리를 꽁꽁 싸매고 있던 할미바위와 할아비바위도 판결을 내기가 어려워 해수욕장들을 돌려보냈습니다. 그러자 해수욕장들은 자신이 더 멋진 해수욕장이라는 것을 뽐내기 위해 사람들을 더 오래 머물게 하기위해 사람들이 버리는 쓰레기와 오물들을 눈감아 주었지요. 그렇게 시간이 흘러 쓰레기와 오물들로 가득해져버렸습니다. 보다 못한 할미바위와 할아비바위는 해수욕장들을 불러 모아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기 시작했습니다.
“옛날 어느 날이었어. 평화롭던 마을에 갑자기 큰소리로 뻥!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우리 마을 앞바다가 온통 검은 그림자로 드리워졌지. 그러더니 끈적끈적하고 검은 기름때가 우리 마을 온 바다를 뒤덮기 시작했어. 숨도 쉬기 힘들 지경이었지. 기름때는 순식간에 깨끗했던 바다를 뒤덮고 바위와 돌, 그리고 바다 새들까지도 뒤덮었지.”
딴청을 하며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해수욕장들은 하나 둘 씩 점점 이야기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맑던 바다는 검은 바다로 변했고 물고기와 오리들은 떼죽음을 당했지. 바다에서 조개를 캐고 물고기를 잡아 생활하던 어민들도 한순간에 생활이 막막해진 거야. 이제 태안은 돌이킬 수 없는 버려지는 곳이라고 생각하며 두 눈을 질끈 감았어.”
“그런데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자 다시는 이곳을 찾지 않을 줄 알았던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어. 그리고는 하얀 천을 들고 바다와 갯벌, 바위틈을 천천히 닦아내기 시작했지. 그렇게 모이고 모이던 사람들의 손이 닿는 곳이 다시 밝은 빛으로 변하더니 조금씩 검은 그림자들이 걷히기 시작했단다. 그러니 우리가 이렇게 아름답게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건 다 우리를 위해 하나 둘씩 모은 마음들 덕분이겠지.”
해수욕장들은 그제야 서로 싸우던 자신들과 쓰레기로 더렵혀진 자신들을 부끄러워하며 이렇게 해수욕장들과 깨끗한 바다로 둘러싸인 마을을 자랑스러워하기 시작했답니다. 그리고 태안의 해수욕장을 찾는 사람들에게 그 마음을 보답하고자 더 아름다운 절경을 선물해주고 있다고 합니다.
멀리서 경종소리가 들려왔다. 바우덕이는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했다. 청룡사 남사당패인 개패거리에 들어온 지 오늘로 꼬박 열 두 해째 되는 날이었다. 그녀가 다섯 살이 되던 해 홀아비 머슴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생을 얼마 연명하지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시름시름 앓던 그가 끼니도 제대로 연명하지 못한지 닷새만이었다. 아비는 임종 직전, 때때로 함께 술을 나누던 청룡사 남사당패 꼭두쇠에게 그녀를 맡겼다. 왜 하필 남자들만 있던 남사당패에 그녀를 맡겼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개머리패에 들어온 그날부터 그녀는 김암덕이라는 이름 대신 바우덕이라고 불렸다.
그녀는 갖가지 기예를 배워나갔다. 어름(얼음 위를 걷듯이 어렵다는 줄타기), 풍물과 버나(대접돌리기), 살판(땅재주)까지 기예를 하나씩 익혀갈 때마다 사람들은 그녀의 재능을 놀라워했다. 바우덕이는 모든 기예에 능했다. 그녀가 거리낌 없이 재주를 익혀나갈 수 있었던 것도 꼭두쇠인 곤(滾) 덕분이었다. 그는 바우덕이에게 있어 아비나 마찬가지였다. 발이 부르트도록 줄 위에 올려두었다가도, 밤이 되면 그녀의 발에 어렵사리 장(醬)을 구해 발라주던 것도 그였다. 바우덕이는 곤을 유독 따랐다. 그럴수록 줄타기에 매달렸다. 그녀는 위태로운 줄 하나에 몸을 내맡겨 날아오르는 것이 좋았다. 그 모양새가 제 처지와 비슷해 보이기도 했고, 늘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살아야 했던 그녀에게 하늘을 위해 솟아오르는 일은 유일한 해방구였다.
곤은 그녀가 열다섯이 되자 꼭두쇠에서 물러났다. 이레 전 수레에 다리가 밟히는 사고를 당했기 때문이었다. 바우덕이를 향해 돌진하던 수레를 가로막아 당한 사고였다. 곤의 다리는 점차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더 이상 놀이를 하지 못하는 그는 꼭두쇠로 있을 수 없었다. 곤은 울고 있는 그녀를 불렀다.
“덕아, 왜 우느냐.”
덕이는 울음이 북받쳐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자 곤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는 그저 놀면 되는거다. 네 재주껏 한 판 놀면 되는 거란다.”
그녀는 그날부터 힘껏 뛰어올랐다. 조금 더 높이. 더 크게. 그녀의 줄타기를 본 사람들은 저마다 탄성을 질렀다. 그토록 위태롭고도 높이 날아오르는 사람은 없었다. 바우덕이는 안성을 넘어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탔다. 그녀의 줄타기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에 쓰이는 일꾼들을 위해 그녀의 남사당패를 불러 들였다.
합장을 하던 그녀의 손이 떨렸다. 그녀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쥐고 있던 부채를 크게 펼쳐보았다. 곤에게서 받은 부채였다. 그녀는 그것을 무척이나 아꼈다. 가는 부채살들이 제대로 펼쳐졌는지 꼼꼼히 살폈다. 살 하나가 크게 구부러져 있었다. 부러진 살을 세우려고 했다. 하지만 한번 부러진 부채살은 세워지지 않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는 크게 한번 숨을 가다듬었다. 바우덕이에게 오늘은 무엇보다 제일 큰 놀이판이었다. 머리에 두른 두건을 다시 한번 질끈 묶었다. 꽹과리 소리가 크고 경쾌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그때 멀리서 곰뱅이쇠가 뛰어왔다. 숨을 헐떡이는 그의 얼굴은 온통 눈물범벅이었다. 그녀는 보따리에서 탈 하나를 꺼내들었다. 곰뱅이쇠가 바우덕이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녀는 곤이 처음으로 만들어주었던 탈을 썼다. 바우덕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어떠한 표정으로 서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손이 줄을 튕겼다.
이내 바우덕이는 줄을 타기 시작했다. 그리고 평소보다 더 거침없이 뛰어올랐다. 한번! 두 번! 세 번! 일꾼들이 그녀의 줄타기를 보며 추임새를 넣었다. 그녀는 마치 춤을 추는 듯 했다. 한 손에는 활짝 펼쳐든 부채를 부드러운 곡선을 따라 흔들었다. 바우덕이의 양 다리는 꼿꼿이 그러면서도 유연하게 움직였다. 하늘을 향해 춤을 췄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크게 회전하며 돌기 시작했다. 그녀의 춤은 멈출 줄을 몰랐다.
어린나이에 남편과 헤어지고 홀로 아이를 키우고 있는 것도 벌써 3년이 지났다. 친정엄마도 아이를 그다지 탐탁지 않아 하였기에 아이를 봐달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서부터 어린이집에 신세를 지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린이집 원장님께서 전화를 주었다.
“풀잎이 어머님 되시죠? 여기 어린이집인데요. 아이 문제로 상의드릴 일이 좀 있어서요.”
아이에게 무슨 문제가 있다는데 나는 급하게 처리하던 일 때문에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더 급하니 나중에 다시 전화를 걸어 달라고 말할 뻔했다.
“네? 잠시만요. 아이 문제라니요?”
“풀잎이가. 말을 잘 안하려고 하네요.”
“아이가 원래 말을 잘 안 해요. 집에서도. 몸이 아프거나 그런 건 아니죠?”
“어머님. 이건 몸이 아픈 것 보다 더 심각한 문제인 것 같은데요. 일단 오늘 저 좀 뵙고 가세요.”
어린이집 원장선생님께 한 차례 꾸중 아닌 꾸중을 듣고 난 뒤 7시가 넘은 시각에 아이를 데리러 갔다. 아이는 방 한 편에 곤이 자고 있었다.
“풀잎이 어머님 되시죠? 잠시 제 방으로.”
“네, 오전에는 죄송했어요. 제가 급한 일을 처리할 게 있어서. 원장님 이야기를 귀담아 듣지 못했네요.”
“일이 많이 바쁘신 건 알겠지만. 그리고 제가 의사도 아니라 잘은 모르겠지만 풀잎이가 유난히 또래보다 정서발달이나 언어 발달이 늦은 것 같아요. 지금 풀잎이 정도면 한창 이것저것 호기심도 많고 말도 많이 웅얼거릴 시기인데 혼자 장난감만 쥐었다 폈다 정도니까.”
원장님의 말에 갑자기 무서운 마음이 들었다. 아이에게 좋은 옷, 좋은 음식,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려고 했던 것뿐인데 지금 아이는 홀로 너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니. 그것도 이렇게 조그마한 아이가.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네? 선생님.”
“뭐, 일단 아이와 최대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엄마 아빠와 고루 정서를 교감하는 것이 아이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물론 그러기 힘들다는 것 저도 잘 알고 있지만요. 아니면 자연이나 동물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도 차선책이긴 하지만 그런 것도 좋고요.”
아이와 최대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최선이라는 원장선생님 말씀에 큰 결심을 해야 했다. 엄마손이 가장 많이 필요한 시기에 엄마와 함께 있는 시간이 부족한 아이는 정서가 고루 발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랜만에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이번 주 주말에 하루만 시간을 내기로 했다.
오랜만에 우리 세 식구가 모였다. 가족이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어색함이 감돌았지만 날씨도 좋았고 북서울꿈의숲에는 역시나 가족단위로 모인 사람들이 많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넓고 넓은 잔디밭이 어색한지 자꾸만 한곳에 가만히 서있었다. 아이의 손을 잡고 잔디를 밟아보았다.
“풀잎아. 이게 잔디야. 잔디. 그리고 지금 풀잎이 볼을 스치고 간 건 바람.”
풀잎이도 마음이 조금 열렸는지 발을 콩콩 굴렀다. 한 손에는 아빠의 손을 다른 한 손에는 엄마의 손을 잡은 풀잎이는 모처럼 신이 난 모양이었다.
“우리 풀잎이 기분 좋아? 풀잎이가 좋으니까 엄마도 기분 좋다.”
“엄마, 아빠, 풀, 바람, 하늘, 구름”
풀잎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단어들을 나열하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런 아이의 모습을 보니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눈물이 흐르는 것을 감추기 위해 하늘을 바라보니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쾌청했다.
남편이 이런 내 모습을 보았는지 가볍게 등을 토닥여 주었다. 남편의 뜻밖의 행동에 서러움이 북받쳤는지 또 눈물이 핑 돌았다.
“혼자 힘들었을 거 알아. 양육비랍시고 돈 보내주는 것 밖에 못해서 미안해. 오늘 풀잎이 보니까 나도 느끼는 거 많았어. 미안해. 앞으로 자주 시간 보내자.”
남편의 말에 어쩐지 힘이 났다. 그 누구의 말보다 그 누구보다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했다.
사사삭 사사삭, 나는 유독 의성어나 의태어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소리들을 좋아했다. 예를 들면 뽀드득 뽀드득 같이 눈 오늘 날 눈을 밟을 때 나는 소리나 가을철 떨어지는 낙엽을 밟을 때 나는 바스락 거리는 소리 그리고 모래사장에서 맨발로 모래를 밟을 때 나는 사사삭 하는 소리와 같은 것 말이다.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소리들에 남달리 귀가 쫑긋 솟는 나는 그만큼 소리에 민감하게 굴어 친구들과 자주 다투기도 했다. 어쩐지 친구들은 그런 나와 싸우면 치사하게 내가 싫어하는 소리들을 내곤 했다. 칠판을 손톱으로 긁는다던가 식판을 숟가락으로 긁는 다는 등.
누군가 내게 가장 좋았던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는 타임머신이 있다고 해도 나는 돌아갈 수 없을 것 같다. 가장 좋았던 그 순간 같은 해에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순간이 교집합처럼 얽혀있기 때문이다.
5년 전 여름 나는 가장 좋아하는 친구 유경과 마주앉아있었고 우린 웃으며 팥빙수를 나눠먹었다. 성격도 잘 맞고 모난 내 성격을 잘 받아주는 유경이었기에 우린 소위 평생친구를 하기로 하며 자주 만났다. 유경과 한참 다이어트를 하며 다음 해 여름엔 꼭 살 빼서 비키니를 입고 부산 앞바다를 누비고 다니자며 약속을 했었는데 우정도 사소한 말다툼엔 배길 재간이 없었다. 사실 지나고 보면 별 것도 아닌 것이었는데 그 때의 소녀감성엔 말 한마디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렇게 화해를 하긴 했지만 한 번 금이 간 접시를 다시 쓸 수 없는 것처럼 우리 둘 사이의 보이지 않는 공백은 쉽게 메워지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친구 B에게 유경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당장 전화기를 들어 만나자고 하고 지난날을 후회하며 눈물 콧물을 쏟으며 화해를 하고 웃으며 보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나는 그러지 못했다. 괜한 자존심도 아니었고 유경에 대한 미움이 남아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저 네가 미국으로 떠나는 날 괜스레 송도해수욕장을 나와 맨발로 하염없이 모래사장을 거닐기만 했었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났을까. 학창시절에는 별로 친하지 않았던 친구 B와 연락을 지속해오던 나는 B에게서 유경의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조만간 한국에 잠시 들어온 다는 것이었다. 친구 B에게 소식을 전해들은 나는 멋쩍은 말투로 그래? 라고만 했을 뿐 언제인지 어디로 오는지 캐묻지 않았다.
이년 간 다닌 직장을 그만 둔 나는 며칠 간 방안에서 빈둥거리기만 했다. 그러다 문득 친구 B에게서 들은 유경의 소식이 머릿속에 맴돌았기에 점퍼 하나만 집어 들고 송도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여전히 사람들은 많았다. 물놀이를 즐기는 이들은 없었으나 나처럼 맨발로 모래사장을 걷는 이들은 많았다. 사사삭, 사사삭. 내 발끝으로 모래가 밟히자 얄궂은 소리를 내며 내 무게 그대로를 바닥에 그려나갔다. 그렇게 한 발자국 두 발자국을 걸었다. 사사삭 사사삭.
그런데 저 멀리에서 아주 낯익은 누군가가 보였다. 유경인지 아닌지 구별할 수는 없었지만 어쩐지 유경의 모습인 것 같았다. 나는 섣불리 달려갈 수 없었다. 만약 유경이라면 무슨 말을 건네야 할까? 미안했다고 보고 싶었다고 말해야 할까? 아니면 그렇게 가버리는 게 어디 있느냐고 소리를 질러야 할까?
문득 천천히 유경에게 다가가는 데 바닥에 탁 하고 걸리는 것이 있다. 빈 소라껍데기였다. 소라껍데기를 집어 들고는 잠시 귀에 가져다대었다. 사람들이 많았기에 소라껍데기에서 바다 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을 텐데 내 귓가에는 솨아아하고 바다소리가 들렸다. 유경이도 나를 보았을까? 내 발걸음이 조금은 빨라졌다. 유경에게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다가가는 데 귓가에서는 더 이상 사사삭하는 모래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오직 소라껍데기에서 들리던 솨아아 하는 소리만 들릴 뿐.
그렇게 맨발로 걸어간 그 길 끝엔 거짓말처럼 유경이 서있었다. 유경은 나를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그리고는 맨발로 달려온 내 발끝만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하구나 넌. 모래사장 걸으면서 사사삭 소리 듣는 거 보니. 나한테 무슨 할 말 없어? 난 너한테 할 말 되게 많았는데.”
나는 말없이 빈 소라껍데기를 건넸다.
“여기, 여기에 내가 하고 싶은 말 다 담았어. 들어봐.”
유경은 웃으며 빈 소라껍데기를 귓가에 가져다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