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크림, 초콜릿, 딸기우유……. 아이는 할아버지 댁에만 가면 기다렸다는 듯 할아버지 손을 잡고 슈퍼로 향한다. 평소에는 군것질거리를 사 먹이지 않으니 이때다 싶은 것이다. 슈퍼에 도착하여 고른 것들은 온통 단것들이다. 당당한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와서는 의기양양하게 과자들을 품에 쏙 넣는다. 내가 빼앗으려고 하면 할아버지 품으로 쏙 숨는다.
“아빠도 참, 애가 떼를 써도 이렇게 단거 막 먹이면 안 된다니까.”
“자주 먹이지도 않는데 뭘 그러냐. 그리고 애들 때는 다 이런 거 먹고 싶은 거야. 그리고 꼬맹이가 이렇게 매달리는데 할애비가 되가지고 어떻게 모른 척하냐?”
“그걸 노린 거라니까. 아빠, 요즘 애들 다 유기농이다 몸에 좋은 것들만 먹이는 거 몰라요? 이렇게 슈퍼에서 파는 거 입맛 들면 못쓴다니까. 과자도 마약과 같은 거야. 먹다보면 계속 먹고 싶어진다니까.”
“유난은, 너도 다 이런 거 먹고 자랐어.”
“요즘 애들은 피부가 연약하고 아토피 그런 것도 잘 생긴단 말이야.”
“알겠다, 알겠어. 그럼 저기 곶감을 가져다 줘야겠구나.”
아이가 귀여운 얼굴을 하고 애교를 떨면 어찌 안 넘어가고 배기겠는가. 자식보다 손주새끼들이 더 끔찍하게 예쁘다는데.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손주가 사달라고 하는 걸 딱 잘라 거절하기 어려우셨을 것이다. 더군다나 늦게 결혼한 딸내미가 노산으로 힘겹게 얻은 자식이니 친정 부모로서 말은 안 해도 애를 많이 태우신 모양이다. 그래서 아이를 만지면 닳을까 애지중지 하신다. 구부정한 허리는 이제 다시 반듯해지기를 포기한 화석처럼 굳어져 있고 지팡이 없이는 오래 걸으시지도 못하지만 아이와 함께라면 힘든 줄도 모르신다고 한다. 요즘말로 손주바보가 따로 없다.
아이를 불러 곶감을 내미니 아이는 냄새부터 킁킁 맡아본다. 감을 말린 것 이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먹는 건지 아닌지 확인부터 하는 것이었다. 할아버지가 맛있다고 먹어보라고 해도 뒷걸음질을 칠뿐이다. 그러자 좋은 묘책이 생겨났다는 듯 아이를 무르팍에 눕히더니 재미있는 곶감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것이다. 아이는 재미있는 이야기라는 말에 냉큼 할아버지 무릎에 누웠다.
“옛날 옛날에 호랑이 한마리가 먹이를 구하려고 마을 어귀까지 어슬렁어슬렁 내려왔단다. 그런데 어느 집안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크게 들리는 게야. 그래서 아기 엄마가 아기에기 "귀신 온다." 그랬지, 그랬는데도 아기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어. 그래서 이번에는 "호랑이 온다."그랬지. 그랬는데도 아기는 더욱 크게 우는 것이었지.
그래서 이번에는 "곶감 줄까?" 그랬더니 아기가 울음을 딱 그쳤다는 거야. 그것을 들은 호랑이는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호랑이인 줄 알았는데 자기보다 더 무서운 것이 곶감이로구나 생각했지. 그 뒤로 곶감소리만 들리면 뒤꽁무니가 빠지게 도망쳤다는 구나.“
우와. 하고 탄성을 지르더니 아이는 이내 할아버지 손에 들린 곶감에 관심을 보이는 것이다. 아이들은 역시 단순하구나 생각하면서도 아이의 순수함에 웃음이 났다.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곶감이 자기 앞에 있다고 신기하다며 한입 베어 문다.
생각보다 단맛이 돌아서인지 아이는 과자를 내려놓고 곶감을 찾았다. 곶감이야기 때문인지 아이는 그날이후로 곶감할아버지네 가자고 한다. 그러면서 할아버지 손을 잡고 슈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말려놓은 곶감을 가지고 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성화다. 혹 떼려다 혹 붙였다며 껄껄껄 웃으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엷은 미소가 지어졌다.
“곶감 하나 줄까?”
“웅 할아버지, 재미있는 이야기도!”
“자. 그럼 시작해볼까? 옛날 옛날에~”
내가 아이를 처음 본 것은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찾아갔던 한 허름한 고아원에서였다. 무리에서 동떨어져 먼 산만을 바라보고 있는 그 모습이, 애교를 부리며 다가오는 다른 아이들보다 더 기억에 선명하게 남았다.
“부모가 이유 없이 밤마다 애를 때렸대요. 그래서 그런지, 여기 온 지 삼 년이 넘었는데도 여태 아무 말도 안 해.”
원장 선생님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이는, 마치 외로운 섬 같았다.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순하게 생긴 것이, 아무리 봐도 참 잘 생겼다고 친구들이 입을 모아 칭찬했는데, 내 눈에는 왠지 다르게 보였다. 기암괴석이 자라나고, 안개와 구름에 묻혀 있는 섬. 아이는 내가 알고 있는 섬 하나를 꼭 닮아 있었다.
아이는 예상보다 훨씬 더 신경질적이었다. 마치 자신에게로 향하는 타인의 관심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외향적인 성격을 내 최고의 자랑거리로 삼고 있었기에, 나도 모르는 새에 나를 온몸으로 거부하는 그 아이에게도 인정받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그러나 아이는 그런 나를 힐끔 쳐다보기만 할 뿐, 내게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한 달이 가도, 두 달이 가도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역시, 민주 씨한테도 쟤는 무리네요. 지금까지 왔던 사람들 중에 아무도 저 아이와 친해지지 못했어요. 유현이가 처음 올 때부터 여기 있었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고요.”
고아원 사람들마저 유현이에게 혀를 내두르는 모습을 보고 오기가 생겼다. 나는 애초에 예정 되어 있던 봉사 기간을 늘렸고, 유현이의 마음을 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집에서 쿠키를 구워 오고, 유현이가 좋아할 만한 장난감을 사다 바치는 등 정신을 차려보니 남자친구에게도 안 했던 일들을 그 아이에게 해 주고 있었다.
“누나가 토요일마다 여기 와서 유현이랑만 놀아 줄게. 그러니까 유현이도 토요일에는 누나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아이는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나는 매주 토요일마다 유현이를 만나러 갔다.
삼 개월이 지나고, 사 개월 차에 접어들자 나도 슬슬 지쳐갔다. 매번 주말이면 고아원에 가는 것에 불만이 많던 남자친구와 크게 싸운 날. 그 날도 유현이는 내게 등을 보이고 앉아 있었다. 나는 애써 서운한 마음을 감추고 밝은 목소리를 짜내어 인사를 건넸다.
“유현아, 누나 왔어.”
유현이가 이쪽을 힐끗 쳐다보더니, 금방 다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갑자기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대체 이 아이가 뭐라고 내가 이렇게 많은 시간을 쏟아 붓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야, 너. 내 얼굴 좀 보란 말이야. 사람이 이렇게 신경을 써 주면 조금이라도 변하는 게 있어야 할 것 아니야. 네가 그렇게 잘났니?”
쿵쿵 발소리를 내며 다가가 유현이의 팔을 끌어당기는데, 아이가 소스라치게 놀라 두 팔로 제 머리를 감싸 안았다. 한 번도 말을 한 적이 없던 아이가 갑자기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리며 바닥에 웅크린 순간, 나는 내가 정말로 못된 행동을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아이는 악을 쓰며 울었다. 유현이가 내 뱉는 말들 중에는 엄마나 아빠, 그리고 잘못했다는 말들이 섞여 있었다. 아이는 한 순간에 과거로 돌아가 버렸다. 아이가 느끼는 고통이 내게도 생생히 전해져 왔다. 하지만, 나는 그 아이를 안아주지 못한 채 그냥 거기서 도망쳐 버렸다.
유현이를 잊으려 숱한 노력을 해 왔지만, 지금도 내 꿈속에는 가끔 온 몸을 둥글게 만 채 흐느껴 울고 있는 유현이가 나온다. 나는 이제 그 아이가 그저 다른 사람의 눈을 마주보는 것을 두려워했다는 것을 안다. 그 아이가 토요일마다 창가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음을 안다. 그리고 나는 이제, 내가 다시 그 아이를 안아주러 가지 않는 한 그 아이의 상처가 영영 낫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안다.
돌아오는 토요일, 유현이와 약속했던 그 시간에 유현이를 보러 가겠다고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고아원에 가기 전에, 유현이를 닮은 섬을 보러 왔다. 몰운대. 구름에 묻힌 섬이라는 뜻이다. 이름처럼 보일 듯 말 듯, 구름과 안개에 겹겹이 둘러싸인 그 섬은 이제 끊임없이 흘러드는 흙과 모래로 육계도가 되었다. 해안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나는, 우리 둘의 사이에도 흙과 모래가 흘러들고 있다고, 유현이에게 그렇게 말해 주기로 다짐했다. 구름에 묻힌 그 모습을 다들 사랑하고 있다고 말이다.
오늘도 입단속 철저히 하거라.
상궁마마님의 낮고 지엄한 목소리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이곳은 말 한마디도 새어나갈 수 없는 지밀이다. 나는 지밀나인 중 하나로 나이가 가장 어리다.
문과 문 사이를 두고 나오는 말소리. 상궁마마님들이 하는 이야기. 왕후와 상궁이 나누는 이야기. 그리고 생과방이나 소주방에서 새어나오는 잡다한 이야기 등이 떠도는 곳, 비밀이 만들어지나 절대 새어나가지 못하는 곳 중 하나가 된 곳이다.
“월이 너 그 이야기 들었니?”
“또 무슨 이야기? 도대체 이런 이야기들은 어떻게 떠도는 것인지 모르겠구나. 전하께서 궐에 이야기꾼이라도 들였단 거냐?”
“쉿, 마마님께서 입조심 하란 말 못 들었어? 전하라는 단어도 입에 함부로 올리지 못 하는거 모르니?”
“답답해서 그래. 답답해서. 떠돌아다니는 이야기는 많은데 도무지 말할 곳이 없잖아. 그나저나 아까 하려던 이야기는 무어냐?”
“아, 그게. 전하께서 사모하는 여인이 있는데 그 여인을 위해 매일 밤 가야금을 탄다고 하더구나.”
“뭐? 중전마마 말고 사모하는 여인이 따로 있다고?”
“쉿, 목소리 좀 낮춰. 네 덕에 제 명에 못 죽겠다. 왜 가락국에서 온 악성 우륵이라는 자 있지? 그 자가 가야금을 잘 탄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그 자를 통해 노래를 전한다나 뭐라나.”
“게 거기서 무엇을 속닥거리는 것이냐?”
참모의 불호령이었다.
“아 아닙니다. 그저 잡언이었습니다.”
“입 함부로 놀렸다가는 다들 알지? 쓸데없는 말 흘리지 말고 일이나 해야 할게야.”
가야금이라. 우륵이라는 자를 통해 노래를 띠운다. 전하께서 꽤나 로맨틱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어쩐지 가야금에서 참으로 기묘한 소리가 난다고 생각했다. 그저 기교가 좋아서가 아니었다. 튕기고 뜯는 그 음정 하나하나에 무언가 있었어.
드르륵 문이 열렸다. 지밀나인 두 명과 김상궁과 조내관만이 동행하여 우륵을 만나러 간다는 명이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오전에 생과방에서 나눈 이야기 때문이었다.
입을 함부로 놀릴 수 없었던 월야는 입을 꾹 다물고 김상궁의 뒤만 바짝 쫒았다.
구슬픈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하께서는 꽤나 흡족한 미소를 보였다. 눈을 감으시고는 구슬픈 가락에 귀를 기울였다. 흐음 하고 전하의 입에서는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우륵이라는 자가 전하의 심정을 너무 잘 꾀고 있었던 것일까. 노랫가락에 온 신경을 쏟느라 숨 한 번 크게 쉴 수 없었고 침도 함부로 삼킬 수가 없었다. 고개를 빳빳이 들 수도 없었기 때문에 좀 더 가락에 집중할 수 있었다.
확실히 궐 안에 있는 악사들과는 다른 음색이었다. 무언가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오전에 생과방에서 있었던 이야기가 거짓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여인을 위해 올리는 곡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아. 하마터면 감탄사를 입 밖으로 내뱉을 뻔했다.
처소로 돌아온 뒤 날이 밝고 나인들 몇 명이 소주방에 모여 있었다.
“얘, 너 어제 우륵이라는 자의 가야금 가락 들었다며? 어때? 정말 전하께서 여인을 위해 띄우는 가락이더냐?”
“글쎄요. 저는 모릅니다. 그저 가락만 들은 것이었지요.”
“얘가, 자세히 좀 말해봐.”
“정말이어요. 가락이 구슬프고 또 구슬펐지요. 그것이 여인을 위함인지 나라를 위함인지는 모르겠어요.”
“아이 재미없어. 됐다 얘, 가봐.”
언젠가 전하의 용안을 뵙는 날. 전하의 마음이 잘 전달되었을 것이라 말씀드려야 겠다는 것뿐이었다.
어느새 ‘강남’이라는 행정자치구 자체가 하나의 문화가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강남을 외쳤고 그 외침 하나로 강남이라는 지역 일대에 파란이 일었다. 땅값은 물론 그곳에서 피어난 문화, 패션, 거리 하나까지 그 시대의 트렌드를 이끄는 한 공간이 되어버렸다.
강남스타일이라는 대중가요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도대체 ‘강남스타일’이 무엇이기에 사람들은 그것에 열광을 하는 것일까 생각한 적이 있다.
언젠가 강남이라는 단어는 부의 상징이었고 무너져가는 아파트라도 강남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훈장처럼 달리는 명예였다. 소위 잘산다는 사람들의 동네로 불리는 강남은 여전히 많은 이들의 워너비 동네로 자리 잡고 있다.
“너 장래 희망에다 뭐 썼어?”
“난 청담동 며느리.”
“청담동 며느리가 되는 것이 꿈이야?”
“그럼, 좋은 집안에 시집가서 남편 잘 만나 행복하게 사는 것만큼 좋은 게 어디 있니?”
민지는 청담동 며느리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민지 말대로 좋은 집안에 시집가서 행복하게 사는 것만큼 좋은 것도 없겠지만 그것이 곧 행복이고 꿈이라는 건 조금은 슬픈 일이었다.
드라마에서 재벌집들이 전화를 받으면 동네 이름을 말하며 전화를 받는 것처럼. 민지도 콧소리를 흘리며 ‘청담동입니다’라고 할 것이다.
민지는 항상 만날 약속장소를 말하면 강남역 7번 출구였다. 그래서 친구들은 민지를 강남역 7번 출구라고 부르기도 했다. 금요일이면 강남역은 젊은이들의 문화로 가득했고 만남과 만남으로 들떠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붕붕 울리는 음악과 현란한 사람들의 발소리가 늦은 시각임을 실감하지 못하게 했다. 민지의 헬스클럽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강남역 7번 출구로 나갔다.
민지는 운동으로 잘 다져진 탄탄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것도 다 청담동 며느리가 되기 위한 하나의 조건이라고 하며 자랑스러워했다.
커피숍에 들어가도 민지는 아메리카노 이외에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나는 약간 비꼬는 목소리로 그것도 강남 스타일이냐? 라며 비웃었지만 민지는 눈 하나 끔뻑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도도한 목소리로 그렇게 달달한 거 자꾸 먹으면 ‘살쪄’라며 생크림 잔뜩 들어간 달달한 내 음료를 비난했다.
한강을 사이에 두고 사람들은 강남과 강북을 갈랐고 조망권과 교통권, 문화생활의 차이를 만들어갔고 그 차이를 통해 만족을 느끼려했다.
어쩌면 강남은 서울의 수도가 아닐까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뛰는 이유는 무엇일까. 더 많은 스펙을 쌓으며 어떤 것을 이루려고 하는 것일까. 과연 서울에도 수도가 있다면 그곳은 강남일까.
여전히 강남역엔 사람들이 붐볐다. 압구정동이나 청담동에는 비슷한 차림새에 비슷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생각과 다른 사연들을 품고 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나는 물끄러미 지나가는 행인들을 바라보았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돈이 많은 건 아닐 텐데. 비슷한 얼굴에 비슷한 차림을 하고 있지만 그들이 원하는 삶과 생각은 다를 텐데 말이다.
민지와 꽤 늦은 시간에 헤어졌다. 민지는 저들 틈으로 사라져갔다. 유유히. 민지는 금세 사람들 사이에 스며들어 누가 누군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멀어져갔다.
순간 나는 길을 잃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내가 가야할 곳을 말해줄 것 같은 사람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만 나에게 ‘이쪽으로 가면 강남역이 나오고 저쪽으로 가면 청담으로 가는 길일 거예요. 저쪽은 삼성동이고요.’정도로 이야기 해주겠지.
겨우 길을 걸으면서 나는 민지를 떠올렸다. 우리는 민지를 선뜻 속물이라고 말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아니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사람들의 통념이 그렇듯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웬만하면 서울, 그 중에서도 강남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더 많은 사람들의 장래희망이 혹은 꿈이 ‘도곡동 고급아파트, 삼성동 유명백화점, 청담동 며느리’가 되지 않기를 바랄뿐이었다.
그 해 여름은 유난히 무더웠다. 뉴스에서는 비닐하우스에서 딸기를 따던 노인의 갑작스런 사망을 보도했다. 사실상 장마나 태풍이 왔다고 해도 기승을 부리는 더위는 쉽게 가실 줄을 몰랐고 사람이고 식물이고 더위에 지칠 수밖에 없었다. 선풍기나 에어컨이 없는 곳에서는 땀이 비 오듯 흘렀다.
택배 배달 일을 하는 나는 유난히 더위에 도출이 잦았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면 옷이 땀에 젖었다 말랐다 해서 비릿한 냄새가 났다. 아내는 내 땀냄새를 보고 돈냄새라고 했다. 아내에게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이었지만 순수하던 아내가 속물이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에 미안했다.
일하던 중 유일하게 쉴 수 있었던 곳은 시원한 백화점이나 좋은 건물에 배달을 가는 것이었다. 운이 좋으면 시원한 음료를 건네기도 했고 수령인이 한 10분만 기다려 달라고 하면 못이기는 척 시원한 곳에서 에어컨 바람을 쐬면서 기다려주기도 했다.
그 해 여름은 유난히 무더웠다. 아마도 폭염주의보가 사흘째 이어지던 날일 것이다. 온 몸에 주름진 곳이라면 땀이 끼어있었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고 쉴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므로 수십 개 아니 수백 개의 노란색 박스를 옮겨 담았다. 오로지 아내와 딸아이를 생각하면서였다.
순간 핑.
하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눈을 끔뻑이며 정신을 차려보려고 했으나 이미 하늘은 노란빛을 띠었고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 전부 두 개로 겹쳐 보이다 이내 검은 빛을 띠었다. 악 소리 한번 질러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상자박스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고 그 다음은 기억이 없다. 눈을 떠보니 하얀색 천장이 보였고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아내의 얼굴이 보였다. 아내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있었고 내가 눈을 뜬 것을 확인한 뒤 이내 약간의 혈색이 도는 듯 했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내의 얼굴임을 알면서도 잠시 동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곳이 어디인지, 나는 왜 여기에 누워있는지.
“당신 괜찮아요? 정신 잃고 쓰러졌었는데.”
순간 하늘이 핑 돌더니 이내 쓰러졌던 모양이다. 건강만큼은 자신한다고 생각했는데, 택배 일 하면서 절로 운동한다고 탄탄해진 허벅지를 자랑했는데 이내 쓰러진 모양이었다.
“쓰러졌다고? 얼마나?”
“쓰러지자마자 누가 바로 보고 신고해줘서 다행이었어요. 지금 한 한 시간 정도 지났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그래? 이제 괜찮아. 그나저나 배달은 어떻게 한담.”
“지금 배달이 문제에요? 당신 열사병 때문에 쓰러진 거래요. 날이 계속 덥더니만.”
“열사병?”
쓰러진 이유가 과로이거나 빈혈인 줄 알았는데 열사병이었다. 그날따라 덥더라니.
퇴원 수속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약을 처방받고 며칠간은 뜨거운 곳에서 지나치게 운동을 하거나 일을 하는 것을 삼가라고 했다.
지나치게 운동을 하거나 고온 환경에서 일을 삼가라니. 일을 바로 쉴 수는 없었다. 그저 요령껏 땡볕에서 보내는 시간을 줄이고 시원한 물을 자주 마셔주는 것 밖에는 별 도리가 없었다.
출근 준비를 위해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데 아내가 웬 봉투를 쓱 내민다.
“이거 입고 다녀요. 이거 최고 좋은 거라 비싸게 주고 산거니까.”
아내가 내민 것은 모시양말과 손수건, 개량한복처럼 생긴 모시옷이었다.
“한산 모시? 모시를 입고 출근하라는 거야?”
“모시는 뭐 노인네들만 입으라는 법 있어요? 요즘 젊은이들도 시원하고 가볍고 통풍 잘된다고 다 입고 다녀요. 당신 또 쓰러지면 어떻게 해? 그러니까 그냥 입어요.”
아내는 내가 쓰러졌을 때 꽤나 놀란 모양이었다. 아내가 준비해 준 옷을 한번 입어본다. 바람이 분 것도 아닌데 시원했다.
살갗을 스치는 까슬까슬한 느낌이 좋았다.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에 걸을 때마다 부스럭한 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제법 쌀쌀한 바람에 소매사이로 찬바람이 새어 들어온다. 겨울이 왔나보다.
궁을 떠나온 지 닷새가 훌쩍 지났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누구보다 조정과 임금을 생각하며 성실히 정치를 펼쳤다. 누구보다 학식이 뛰어났고 어진 성품으로 임금을 잘 보필하던 그였다.
하지만 어찌 정치를 하는 사람들과 궁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이와 같은 마음일까. 궁의 세력들에 밀려 크게 화를 입은 그는 잠시 영주에 내려와 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가느다란 눈발이 잠시 내려앉았다 사라졌다. 겨울이 왔다.
긴긴 겨울을 어찌 보내랴. 이제 겨울의 시작인 것을. 언제 봄이 오려나.
선비는 긴긴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임금을 걱정했다. 그리고 임금과 함께 정사를 논의하고 싶었다. 하루도 한양이 그리워 발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자리에 들었다.
선비는 조용히 종이를 펼치고 먹을 갈아 붓을 들었다. 옛날 선비의 할아버지가 종종 흰 종이에 매화를 그리셨던 것을 떠올렸다. 선비도 고고하고 기품 있는 매화나무를 그렸다. 그리고는 한 송이 한 송이마다 정성을 들였다.
달빛을 받아 더욱 아름다운 매화나무.
매화꽃 한 송이가 피어나면 그 다음날 또 한 송이.
그렇게 피어난 매화는 하얗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수줍은 미소를 건네네.
겨울이 가면 봄은 더욱 가까워오리. 멀지 않은 곳에 봄은 오고 있네.
선비는 그렇게 정성스럽게 꽃 한 송이씩 여든 한 송이의 하얀 매화를 그렸다. 하얀 매화는 긴긴 겨울의 매서운 추위를 무릅쓰고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선비는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매화나무를 창문에 붙이고 하루 한 송이씩 붉은 색으로 물들였다. 그렇게 여든 한 송이가 다 물들 때면 봄이 오리라 믿었다.
매일 하루를 마무리 할 때면 노랗게 빛나는 달을 바라보며 임금이 있는 곳을 향하여 경건하게 절을 올린 뒤 매화 꽃송이에 붉은 색을 입혔다. 선비는 떳떳하고 흔들림 없는 지조를 지켜내기 위해 노력했다. 내일이면 동지로 부터 여든 한 번째 날이 되는 날이다. 창문에 붙여놓은 매화나무에도 한 송이의 흰 매화가 없이 모두 붉은 빛을 내는 아름다운 매화나무가 완성될 것이다.
드디어 여든 한 번째의 날이 되었다. 선비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보았다. 정말 마당 앞에 매화나무에도 이처럼 꽃망울을 틔운 꽃들이 반겨줄까 긴장되었다.
문을 열어보니 정말로 봄을 알리는 매화가 피어있었다. 선비는 환하게 웃었다. 길고 길었던 겨울이 지나고 찬바람 사이로 붉은 매화가 꽃잎을 흔들었다. 그때였다. 한양에서 온 전갈이라며 다시 한양으로 올라와 정사를 함께 돌보라는 왕의 명이 담겨있었다. 끝까지 의리와 지조를 버리지 않고 봄을 기다린 선비에게 정말로 봄이 찾아왔다.
선비는 감사함에 절을 올리며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겨울이 오면 머지않아 봄은 다시 올 것이다. 그렇게 다시 봄이 오리라.
장거리 연애의 고충은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누군가 이들에게 장거리 연애를 하겠다고 하면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면서 뜯어말릴 것이라 할 정도다. 가장 큰 고충은 다른 연인들처럼 매일 매일 볼 수 없다는 것과 사랑하는 사람 집 앞에서 밤새 기다릴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 흔한 집 앞까지 데려다주는 것도 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 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에 서로를 만나러 달려갈 수도 없다는 것이 가장 가혹하다면 가혹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둘도 처음부터 장거리 연애로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동욱과 선아는 사내커플이었다. 입사동기로 들어와 함께 밤새워가며 프로젝트를 맞고 기획안을 작성하며 서로에 대한 호감을 키워나갔다. 그러던 중 동욱에게 갑작스런 지방발령이 떨어진 것이다.
“이대리, 자네도 곧 대리에서 벗어나야지. 언제까지 대리 그 자리에 머물기만 할 건가? 딱 2년만 눈감고 내려갔다와. 올라오면 팀장자리 하나 내 만들어 놓을테니.”
“부장님, 그래도 완도까지는.”
“자네 지금 우리 회사에서 완도에 얼마나 신경을 쏟고 있는지 몰라서 그러나? 일단 내려가 봐. 갔다가 아니다 싶으면 다시 올라오면 되잖나?”
회사에서 내려진 인사발령이니 못 내려가겠다고 어린애처럼 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일단 내려간 완도다. 매일 보던 사람이 눈앞에서 사라진다는 것은 참 쓸쓸한 일이었다. 선아는 군대 간 남친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야했고 편지와 문자, 전화로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데이트를 해야 했다.
그날따라 눈꺼풀이 무겁고 축 가라앉는 날이었다. 그 전날 동욱과 통화하면서 몸살이 난 것 인지 상사병이 난 것인지 모르겠다며 투정 아닌 투정을 부렸었다. 어차피 동욱은 바로 올라올 수 없었고 괜히 걱정만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선아도 그저 농담 식으로 이야기 하며 지나갔었다.
하는 수 없이 병가를 내고 집에서 쉬고 있는데 누군가 초인종을 눌렀다.
“택배요”
주문한 것이 없는 데라고 생각하며 가까스로 문을 택배를 받아보니 보낸 사람의 주소가 완도였다. 발신인 이름을 보니 동욱이었다. 놀란 마음과 흥분된 마음으로 택배를 열어보니 완도산 전복과 자그마한 손 편지가 들어있었다. 아마 어제 몸살이 난 것 같다고 잠깐 투정을 부린 것을 잊지 않고 전복죽이라도 끓여먹으라고 보낸 것이 분명했다.
‘많이 아픈 건 아니지? 바로 달려가서 약이라도 사다주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미안해. 그래서 싱싱한 전복 한 상자 보내니까 죽 끓여먹어. 얼른 기운 차리고. 여긴 공기가 참 좋아. 경치도 좋고. 너와 함께 내려왔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그리고 다음 주 주말에 여기 내려올 수 있어? 너랑 같이 가보고 싶은 곳이 있는데.
아참, 죽 끓여먹은 거 인증샷 찍어서 바로 보내! 전화할게. 사랑해!’
동욱의 귀여운 이벤트였다. 싱싱해 보이는 전복을 바라보니 먹지 않아도 힘이 솟는 기분이었다. 따뜻하게 전복죽을 끓여 수저로 먹는 시늉을 하며 동욱에게 인증샷을 찍어 보냈다.
그리고 다음 주에 완도에서 보자고 하트까지 뿅뿅 찍어 보냈다.
동욱말대로 완도는 공기가 좋고 경치가 참 좋았다. 선아가 좋아하는 싱싱한 해산물들이 가득했고 특유의 바다 냄새도 좋았다. 둘은 그동안 못 다한 데이트를 실컷 즐겼다.
저녁이 되어서야 선아는 그때 가보고 싶다던 곳이 어디냐고 물었고 동욱은 선아의 손을 잡고 불빛이 찬란한 곳으로 갔다.
불빛을 따라 간 곳은 다름 아닌 완도타워였다.
“완도에도 이런 곳이 있었어? 남산 부럽지 않네.”
“그렇지? 여기 야경이 끝내줘. 봐봐.”
“그러네. 완도 시내가 다 보여. 불빛들 찬란한 것 봐. 멋지다.”
“나 여기서 얼른 자리 잡으면 이렇게 경치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서 우리 함께 살자.”
선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움이 쌓이는 것도 그렇게 나쁜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언제부터였을까, 지겹도록 건조한 일상의 반복이 시작된 것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꽤나 오랫동안 나는 이 생활을 지속해 왔고 지금은 그 생활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버렸다는 사실이다. 마치 오랜 기간을 만난 연인 사이에는 더 이상의 설렘과 풋풋함이 없는 것처럼. 그래서 그런거였을까. 오래 만난 연인에게 늘 찾아온다는 권태기처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건조하고 팍팍한 일상에서 한 번 벗어나 보고 싶다, 뭔가 말랑말랑하고 몽글몽글한 새로움을 느끼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무엇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또 일상에 문득 찾아온 권태기가 점점 사그라들 때쯤, ‘딩동’하는 핸드폰 알람음이 울렸다. 가끔씩 눈요기용으로만 사용하는 SNS 친구신청 알림메시지였다. 지극히 평범하고 단순한 내 인간관계에 새로울 사람이라고는 없는데 하는 생각과 함께 친구 신청한 그의 이름을 보니 어렴풋이 머릿속에 들어오는 세 글자, ‘조수호’.
그였다.
작년 여름, 한 9개월 전쯤이었지 아마. 회사 일정이 꼬이는 바람에 원하는 날짜에 휴가를 받지 못하고 남들 다 여름을 즐기고 난 후에나 느지막이 3일 휴가를 받았었다. 그래도 나름 휴가인데 하는 마음에 아무 계획 없이 덜컥 기차표부터 끊어 놓았다. 목적지는 파주, 지방에 사는 나로서는 최고의 결정이자,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렇게 나의 파주로의 반짝 휴가는 시작되었다. 여행은 늘 언제나 그렇듯 향하는 곳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과 두려움이 공존한다. 적어도 나에게 파주는 그런 도시였다. 잘 알지 못하는 곳에 대한 두려움과 그래서 더 많이 보고 느끼고 싶다는 벅찬 욕심을 안고 기차에 올랐다. 기차여행에는 음악이 빠질 수 없단 생각에 준비한 라즈베리필드의 ‘청춘열차’라는 노래를 듣기 시작했다.
혼자라도 왠지 기분이 좋은 여행길 / 설렘 가득 안고 달려가고 있어 / 낡은 철길 위로 맑은 하늘 바라보네 / 내 마음은 바람소리에 맞춰 춤을 춰
노랫가사가 내 마음의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행복하고 행복했다.
그렇게 몇 시간을 달려 도착한 파주의 모습은 파랬다. 파아란 하늘과 초록나무로 가득 찬 이곳이 왠지 모르게 좋았다. 제일 먼저 발걸음이 향한 곳은 말로만 듣던, 아니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너무나도 아기자기하고 예뻤던, 파주출판단지였다. 좋아하는 것 세 가지를 꼽으라면 엄마, 돈, 책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책은 그런 존재다 내게, 그래서 더 ‘파주’라는 곳이 특별한지도 모르겠다. 과연 내가 좋아하는 책들이 어떤 곳에서 만들어지고 있는지 직접 두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이고, 행운이었다.
‘행운’, 아마 행운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조수호’. 그 사람을 만났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출판단지 안에 있던 지혜의 숲이었던가. 온통 책으로 뒤덮인 그 곳에서 나와 그는 처음 만났고, 서로 통하는 그 무언가가 있었다. 아직도 기억난다. 그의 미묘하지만 애써 담담하게 건넨 첫마디는 ‘저.. 책 좀 추천 부탁드려도 될까요?’였다. 그리고는 시작된 우리의 이야기는 그날 해가 저물 때까지 계속되었고 급기야는 다음날 임진각까지 함께 가기로 약속했다. 알고 보니 그는 파주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였다. 그럼에도 일부러 그러는 건지, 진짜 어리숙한 사람이여서 그랬는지 임진각을 가는 데에도 꽤나 애를 먹었다. 그래도 참으로 오랜만에 새로운 사람과 만나 함께 서로의 마음과 이야기를 공유한다는 것은 꽤나 신선하고 즐거운 일이였다. 그렇게 3일이라는 시간을 그와 파주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때로는 말할 수 없는 어색함이 감돌기도 했지만 그래서 더 두근거리고 떨렸던 나의 여행. 그는 더 오랜 시간을 나와 함께 하고 싶어 하는 듯 보였지만 이제는 현실의 나로 돌아와야 할 때였다. 기차역까지 바래다주면서 그는 말했다. ‘은하씨, 우리 또 만나요. 또 만나고 싶어요.’라며, 그렇게 나는 떠나고, 그는 남았다. 그리고 그 뒤로 간간이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연락을 주고받던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점점 연락을 하는 횟수가 뜸해졌고, 절대로 마르지 않을 것 같은 이야깃거리도 다 써버린 듯 형식적인 인사들만 주고받다가... 그렇게 서로를 조금씩 기억의 저편으로 묻어버렸다.
그런데 지금 딱, 내가 일상에서의 나른함과 권태로움을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걸 알기라도 한 듯 먼저 손길을 내민 그에게 나는 어떤 대답을 주어야 할까. 그냥 친구신청이라기엔 너무나도 오랜만이고, 그렇다고 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에도 너무 오랜만이었다. 그러나 곧, 떠올랐다. 그를 위한, 아니 그와 나를 위한 명쾌한 대답을.
떠나기로 했다. 다시. 내가 좋아하는 책이 있는, 내가 좋아했던 사람이 있는 그 곳, 파주로.
갑자기 지난 여름의 기억들이 하나 둘 내 가슴 속에 와 닿으며 또 다시 새로운 추억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그래서 예전의 설렘과 풋풋함, 새로움이 가득한 나 자신을 되찾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이번에도 파주행 기차표를 덜컥 끊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