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점점 기력이 쇠해지면서 말수도 적어지셨다. 동네 경로당이라도 다시시면 좋으련만 며칠 나가시더니 그마저도 발길을 끊으셨다. 말이 경로당이었지 할머니보다 연배가 훨씬 적은 젊은 할머니들의 등쌀에 외부인 취급을 받으신 할머니는 그날로 줄곧 집안에만 계신다.
할머니는 건넌방도 거실도 아닌 베란다에 보금자리를 만드셨다. 구부정한 허리에 다리를 곧게 뻗으시고는 베란다 발코니에서 창밖을 내다볼 뿐이었다. 식사를 하거나 화장실에 용무를 보러 가시는 시간 이외에는 대부분 베란다에 계셨다. 베란다와 할머니는 위태로워 보였다. 그런 점에서 할머니에게 제법 어울리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엄마는 할머니에게 화초라도 가꿔보는 것은 어떠냐고 했지만 금방 죽어버릴 걸 뭐 하러 사오냐며 그만 두라고 했다.
할머니는 줄곧 시골에서 사셨다. 꽃다운 나이에 시집온 그 동네에서 알콩달콩 살림을 꾸리며 십수 년의 세월을 보내셨다. 할머니 댁 앞마당에는 작은 개울가와 원두막이 있어 여름이면 꼭 할머니 댁에서 하루를 보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작은 개울가에서 발도 담그고 빨래도 하던 공간을 70여 년 만에 떠나 서울로 올라오신 거다. 얼마 전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엄마가 우리 집으로 할머니를 모셔왔다. 할머니는 한사코 거절하였지만 혼자 시골에서 적적하실 뿐더러 몸도 편치 않으셔서 안 된다며 엄마의 고집이 할머니 고집을 꺾었다. 서울로 올라오신 할머니는 서울도 참 많이 변했다고 하셨다.
할머니는 점점 더 위태로워지셨다. 엄마는 그런 할머니에게 산책이라도 다녀오시라고 했지만 말뿐이었다. 엄마도 할머니에게 최선을 다하고는 있었지만 그 무엇도 할머니의 무언가를 채워주지는 못했다. 베란다에 있는 시간도 더 길어지셨다.
“베란다에 도대체 뭐가 있길래 하루 종일 거기만 쳐다보고 있느냐고. 누가 보면 억지로 데려가 가둬두는 줄 알겠어. 우리 집 신고 당하면 다 엄마 때문인 줄 알아.”
“그냥 답답해서 그런 거니 신경 쓰지 말라 안하나.”
“답답하면 산책을 나가던가. 왜 집밖을 안 나가는데 같이 쇼핑가자고 해도 싫다고 하고 외식을 하러 나가자고해도 싫다 그러고. 노인네가 고집은 또 왜 이렇게 센지.”
엄마는 속상한 마음을 풀어놓았다. 그럴수록 할머니는 더욱 베란다 가까이에 붙었다. 나는 할머니가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아!
할머니를 모시고 청계천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는 변해버린 서울이 두려워 집 밖을 나가기가 무서우셨던 거다. 늙어버린 당신과 함께한 고향을 두고 모든 것이 낯선 동네에서의 두려움은 할머니를 베란다로 내 몰았던 것이다. 그렇게 보금자리에서 위태로운 삶을 버텨가던 할머니는 결국 시골집의 작은 개울이 그리우신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가 병원 검진 때문에 집밖을 나오셔야 하는 날, 나는 진료를 받고 할머니를 청계천으로 모시고 갔다. 아이들은 발을 담그고 하하 호호 웃으며 놀고 있었고 청계천 길을 따라 걷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할머니는 한참 동안 청계천을 바라보셨다.
막혀있던 물줄기가 시원하게 뻗어나가듯 청계천을 흐르는 물줄기가 제법 거셌다. 잘 꾸며놓은 조형물에 가까운 곳이었지만 할머니는 서울 한 가운데에서 시골 앞 개울가를 만난 듯 하셨다. 반가움에 두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할머니, 다리 안 아프셔요? 이제 그만 갈까?”“조금만 더 있다 가자꾸나. 조금만.”
“서울도 많이 바뀌었지요? 옛날에는 여기가 다 시멘트 바닥이었는데. 몰라보게 바뀌었어. 이렇게 꾸며놓으니 좋지요?”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리고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시골 개울가처럼 아이들이 물장구를 치거나 멱을 감지는 않았지만 할머니 눈에는 검게 그을린 개구쟁이 아이들이 수업이 끝나고 미꾸라지를 잡는 모습으로 보이는 듯했다. 청계천 8경 중에서도 할머니는 5경에서 가장 오래 머물러 계셨다. 5경은 빨래터를 재연한 공간으로 아마 할머니의 집 앞 개울을 가장 많이 닮은 곳이기도 했다. 할머니의 눈시울이 조금은 붉어졌다. 그리고 마른 입술을 매만지셨다.
청계천에 다녀오신 후로 할머니는 기력을 조금씩 되찾으셨다. 베란다에 나가 계시는 시간도 줄고 간간히 산책도 다녀오셨다.
할머니의 시간은 앞으로도 흐를 것이고 청계천의 물도 이제는 마르지 않고 흐를 것이다. 언제나 언제나.
또! 또 이야기 해주세요! 네?
손주 녀석이 주위를 맴맴 돌며 자꾸만 성가시게 군다. 옛날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성화다. 녀석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를 생각하는 것이 늙은이의 소일거리가 되어버렸다. 딸애가 손주를 맡기고 외출을 했을 때 하도 심심해하기에 옛날이야기를 한 번 해준 것이 시작이었다.
“동화책보다 할머니가 이야기 해주는 게 훨씬 재미있단 말이야.”
“할머니 귀찮으시니까 책을 보든가 비디오 봐. 네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빌려왔어.”
“싫어. 싫어, 할머니 무릎에 누워서 이야기 들을 거야. 메롱~”
손주 녀석이 내 무릎위에 자리를 잡고 눕더니 기어이 눈을 감고 이야기를 기다린다. 하기야 이제 좀 더 크면 이런 어리광도 못 보겠다 싶어 못이기는 척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야기보따리를 푼다.
“옛날 옛날에, 아주 탐스러운 사과나무 한그루가 있었어. 사과나무는 마을 한 가운데 우물 옆에 있었지. 처음에 마을사람들은 사과나무에 탐스러운 사과가 열리면 우물물처럼 공동으로 사이좋게 나누어 먹었어. 남는 것은 따다가 마을 공동 창고에 보관하면서 먹었지. 그때까지만 해도 마을에 큰 문제가 없었단다. 그런데 문제는 마을사람들의 탐욕이었단다.
언젠가 마을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는 욕심이 자라났고 옆 동네 김씨가 자기네보다 더 많은 사과를 가져가는 것 같았고 옆 집 박씨가 더 탐스럽고 빛깔 좋은 사과를 먼저 골라가는 것 같이 느꼈던 거야. 마을 사람들 모두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탐스러운 사과나무가 자기네 소유물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그래서요? 막 싸우고 그랬어요?”
“원래 사람의 마음에 욕심이 들어차는 순간이 문제란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이 오기를 기다렸던 김씨가 사과나무 근처로 가서 마을사람들 몰래 탐스러운 사과를 따기 시작했단다. 처음에는 한 다섯 개만 몰래 가지고 왔지. 그런데 도둑질이라는 게 습관이 되면 무서운 법이지. 하루 이틀이 지나고나니 김씨는 사과나무에서 사과를 열 개, 스무 개씩 몰래 따오기 시작했단다. 원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지.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마을 회의 때 누군가가 사과나무의 사과가 자꾸만 줄어드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단다. 도둑이 제 발 저린 김씨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화를 내면서 그런 양심 없는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걸리면 가만두지 말아야 한다고 했지. 마을사람들은 김씨의 의견에 적극 동조하면서 사과도둑을 잡아야 한다고 했단다.
그래서 김씨는 머리를 썼단다. 자신이 도둑을 잡아오겠다고 큰 소리를 친 거지. 도둑은 아무래도 새벽녘에 나타날 테니 자신이 숨어 있다가 도둑을 잡겠다고 한 거야. 그리고는 날이 밝으면 도둑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할 속셈이었단다.
날은 어두워졌고 김씨는 우물 옆에 숨어있었단다. 그리고는 잽싸게 사과를 땄지. 그런데 그 때였어. 마을 사람 중에서도 유독 김씨를 눈여겨 본 박씨였지. 박씨는 ‘도둑이다. 사과 도둑이 나타났다’라고 소리를 치며 긴 몽둥이를 휘두르며 김씨에게로 달려왔단다. 놀란 김씨는 그만 휘청하여 옆에 있던 우물에 빠지고 말았어.”
“헉, 그래서 김씨는 어떻게 되었어요? 우물에 빠져서 죽었어요?”
“뒷이야기가 꽤나 궁금한 모양이로구나. 우물에 빠진 김씨는 박씨에게 목숨만 살려달라고 빌면서 그동안 자신이 사과를 훔쳤다고 솔직하게 말을 했단다. 박씨는 김씨를 용서하고 우물에서 꺼내어 주었지. 그런데 박씨가 우물에서 김씨를 구해주자 마자 김씨의 태도가 별안간 달라졌단다. 목숨을 구해준 박씨에게 오늘 일을 마을사람들에게 말한다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박씨를 협박했지. 박씨는 무서운 마음에 알겠다고 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고 있었단다. 그런데 마을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단다. 새벽녘이 되면 우물에서 김씨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어.
자기가 사과도둑이었고 목숨만 살려준다면 마을사람들에게 잘못을 빌겠다고 김씨가 우물에 빠졌을 때 말한 내용이었지.
우물에서 들려온 소리 때문에 김씨의 잘못이 온 동네방네 소문이 났고 김씨는 진정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잘못을 뉘우쳤고 박씨에게도 사과를 했단다.”
“이야. 역시 할머니 이야기가 제일 재미있어요! 다음에도 또 재미있는 이야기 들려주셔야 해요!”
이번 이야기도 꽤나 재미있던 모양이다. 다음 이야기는 무엇을 들려주어야 하나 오늘도 행복한 고민거리가 하나 늘었다.
자영업을 하기 때문에 평소 쉽게 가게 문을 닫을 수 없었던 남자. 그래서 주기적으로 떠나는 휴가도 한번 제대로 떠나본 일이 없다. 그렇게 쉼 없이 달려온 3년이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사업이었기 때문에 남자는 지난 3년간 아내와 아들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마음속으로는 이게 다 처자식을 위해 뼈 빠지게 버는 돈이라고 생각해왔으니까 미안하긴 했어도 조금은 당당했다. 그런 남편을 아내도 적잖이 이해해주는 눈치였다.
생전 가게로 전화를 안 하는 아내인데 웬일인지 가게로 다 전화를 했다. 아내의 말이 빨랐고 약간은 울먹였다.
“전화가 왔었어요. 방금. 민준이 담임선생님한테.”
“담임선생님한테? 왜? 민준이 뭐 사고친거야?”
“아, 아니. 학교에서 청소년 우울증 상담검사 같은 걸 받았는데. 결과가….”
평소 전화는커녕 부모님 모시고 오라는 소리 한번 듣지 않았던 터라 심장이 덜컹했다. 차라리 친구와 싸우거나 숙제를 안 해왔다는 전화였으면 좋았을 걸. 담임선생님의 전화는 뜻밖에도 아이가 학교에서 받은 청소년 우울증에서 우울증 수치가 높게 나왔다는 것이다. 병원에서 좀 더 자세한 검사를 받아보는 것이 좋겠다는 전화였다.
우울증. 학교 다니는 것이 그렇게 힘이 들었나? 아니면 학교에서 친구들과 관계가 좋지 않나? 그런 것도 아니다. 아내의 말대로라면 담임선생님께선 아이들과의 문제는 없어 보인다고 했으니까.
누구를 위한 3년의 시간이었나 생각한다. 남자는 가장으로서 나름대로 열심히 하였는데 아이는 아빠의 빈자리를 조금씩 넓혀가고 있었나보다.
모처럼 가게 문을 닫고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월성계곡으로 떠났다. 병원을 가보기 전 일단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 담임선생님의 소견이었다. 아이는 즐거워보였다. 담임선생님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면, 아니 아내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면 아이에게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감정 상태는 어떤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방송을 타서인지 계곡에는 때 늦은 피서객이 몰려들었다. 아빠와 즐겁게 물놀이를 하는 아이도 보였고 튜브를 타고 물살을 즐기는 아이들도 보였다. 멀리서 고기 굽는 냄새와 옥수수를 먹는 아이들이 보이며 한가롭기 그지없었다. 내 아이의 머릿속도 아니 마음속도 한가롭다고 느껴지면 좋을 텐데 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물은 시리도록 맑았고 푸른빛이 맴도는 풍경은 봄의 화사함만큼이나 밝았다. 저마다 하하 호호 웃는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방갈로 마다 퍼져나갔다.
하루를 아이와 꼬박 즐겁게 놀아본 것이 얼마만인지 남자의 머릿속은 금세 까마득해졌다. 내심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이는 해맑게 방갈로를 뛰어다녔고 여느 때와 같이 즐거워보였다. 은근슬쩍 학교에서의 생활을 물어보기 좋은 시간이었다.
“학교 다니는 것이 힘들어? 친구들과 사이는 어때? 공부하는 것이 지치니?”
“아빠, 그렇게 한꺼번에 많이 물어보면 어떻게 해요.”
“그래도 빨리 대답해봐. 응?”
“음. 아빠! 우리 다음에는 또 어디가요?”
문득 끝이 어디인지 궁금해졌다. 너와 나의 끝. 그리고 이 기나긴 싸움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말이다. 일기예보에서는 분명 별똥별이 떨어진다고 했는데 오늘도 예보는 어긋났다. 남자가 별똥별을 기다린 탓일 수도 있다. 남자가 하늘을 바라보지 않았다면 아니 하늘을 보고 별똥별을 기다리지만 않았어도 그날 떨어지기로 한 별똥별은 떨어지며 많은 이들에게 환희의 순간을 선물하였을 수도 있고 누군가의 소원을 이루어지게 하였을 수도 있다. 남자는 언젠가부터 자신이 무언가를 바라고 기대하면 얄궂게 빗나가곤 했다. 그것이 우연의 일치라고하기엔 야속하리만큼 지속적인 반복이었다.
“오늘도 꽝이네.”
남자는 복권에 당첨되지 않은 사람처럼 아쉬워했다. 기대하지 않는다고 해도 내심 기대가 되는 모양이었다. 남자는 덩그러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왠지 검지도 푸르지도 않았다. 날씨가 제법 쌀쌀했고 남자는 입고 있던 재킷의 옷깃을 여미었다.
남자의 도전은 사실상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몇 년째 사실상 백수로 지내고 있는 것도 남자에게도 남자의 가족에게도 가시방석과 같은 나날이었다. 남들이 말하는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남자의 취업은 쉽지 않았다. 남들이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잠을 자거나 책을 읽을 때 남자는 항상 영어단어를 외우거나 제2외국어인 중국어 테이프를 들었다. 일 년 그리고 이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자 남자는 깊은 산 속 절에 들어가 공부를 해볼까 생각도 했었다. 항상 2차 면접까지는 무난히 통과했으나 결국엔 떨어지고 마는 것이었다. 무엇이 문제인지 남자도 점점 미궁 속으로 빠지는 듯했다. 남자는 문득 떠나고 싶어졌다. 어디로든. 항상 중국어가 나오던 MP3에 잔잔한 발라드로 감성을 채웠다.
남자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끝이 어딘지 잘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그곳은 홀로 걷기 좋은 곳이었다. 숨을 가슴 가득 품어보았다. 가슴이 부푼 모습이 얼마만인가 싶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남자의 어깨는 좁아졌고 초라해졌다. '후'하고 숨을 내쉬었다. 가슴가득 품고 있던 공기가 일순간 밖으로 품어져 나오니 가슴이 후련했다. 사람이 북적이지 않아 더욱 깨끗한 공기가 남자의 양 볼을 스쳤다. 쉬엄쉬엄 뚜벅뚜벅 걸어갔다. 날이 저물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강박이 없었고 다음날 있을 시험을 준비해야 한다는 압박도 없었다. 그저 끝이 보일 때까지 걸어가야 하는 것. 그것이 지금 남자가 치러야할 시험이자 강박이었다. 그것쯤은 별것 아니었기에 남자는 더욱 느릿한 걸음으로 걸어 나갔다. 한참을 걷다보니 멀찌감치 관호산성이 보였다. 늠름하고 호젓한 자태가 남자와는 다르게 당당해보였다.
치열함이 감돌던 곳. 남자도 항상 치열하게 살아왔기에 이곳의 고요함에서 소리 없는 갈등이 느껴졌다. 두려움에 떠는 많은 사람들의 비명과 그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한 함성이 뒤섞였을 이곳.
남자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자신이 걸어온 치열했던 지난날을 떠올렸다. 누군가는 성과 없이 치열하게 살아온 것은 의미가 없다고 할지 모르지만 남자는 후회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다시금 어깨를 펴보았다.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다음날을 걱정했다. 다음날을 걱정하고 나면 그 다음날이 걱정이었다. 남자에게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늘 걱정의 반복이었다. 그런 남자가 여유를 찾은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날이 흐려져도 어두워져도 걱정하지 않았다.
발로 흙을 비벼보았다. 이렇게 흙길로 난 길은 누가 만든 것인지 궁금해졌다.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길을 걸어가는 것 길 자체가 표지판인 셈이었다.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길을 묵묵히 걸어간다면 다른 길로 빠질 염려가 없었다.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는 걱정할 것이 없었다. 조금 늦어지면 어떤가, 도착할 곳이 남들과 조금 다른 곳이면 또 어떤가.
남자는 다시 한 번 가슴에 숨을 가득 머금었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숨을 내뱉었다. 하늘은 맑았다. 해가 지고 난 자리에 스며든 어둠은 따뜻했다. 여전히 검지도 푸르지도 않은 빛이었지만 오늘이라면 별똥별을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별똥별은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의 눈으로 수많은 별들이 쏟아져 내렸다.
남자는 여기가 이 길의 끝이라고 생각했다. 앞으로 난 흙길이 조금 남아있지만 남자에게 이 길의 끝은 이곳이었다. 이제 돌아갈 일만 남았다.
남자의 발걸음은 이전보다 조금 더 가벼웠다.
옛날 옛적에 청도에는 아주 힘이 센 소 두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소들은 항상 서로의 힘을 자랑하려고 다투기 일쑤였죠. 소의 뿔이 맞닿을 때마다 하늘과 땅이 흔들렸습니다. 청도에 사는 동물들과 식물들은 늘 고민이 많았습니다. 다투는 두 마리 소 때문에 하늘과 땅이 흔들리니 식물들은 땅에 뿌리 내릴 수 없었고, 동물들은 제대로 잠을 청할 수 없었습니다. 금세 풀들은 시들어 버리고 동물들은 서로를 힐난하고 다투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도 소들은 싸움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서로의 힘이 비등하기 때문에 그들의 싸움은 끝이 나지 않았어요. 뿔을 더욱 곤두세워지고 서로를 향해 돌진하는 힘은 더욱 강해졌습니다. 하늘과 땅은 날이 갈수록 거세게 흔들렸죠.
결국 참다못해 적중산 중턱에 사는 지혜로운 감나무가 나섰습니다. 천년을 살았다는 이 나무는 청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버팀목이었습니다. 아무리 힘이 센 황소들이라지만 감나무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죠. 감나무는 소들을 적중산으로 불러들였습니다. 그러고는 너희들 중에 저 하늘의 별을 떨어뜨린다면 자신이 아끼는 감 하나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대신에 별을 떨어뜨리기 전에는 둘이서 싸우면 안 된다는 조건을 걸었습니다. 소들은 입맛을 다셨습니다. 감나무가 품은 감을 먹으면 힘이 더욱 세어지고 온몸에서는 아름다운 색동빛을 뿜게 된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죠. 또한 청도 감나무의 감은 반시라고 불리며, 그 육질이 굉장히 연하고 너무나 달콤해 한번 맛보면 그 맛을 잊을 수 없었거든요.
그때부터 두 마리의 소는 서로가 아닌 하늘의 별을 떨어뜨리기 위해 열심히 하늘을 향해 돌진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떨어뜨리려고 해도 별들에게 그들의 뿔이 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처음으로 다투지 않고 머리를 맞댄 채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답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나 답답했던 황소 한 마리가 산을 향해 뿔을 내다박았습니다. 그러자 뿔이 조금 부스러지더니 반짝이는 빛으로 흩어졌습니다. 밤에 흩날리는 빛은 마치 별들처럼 보였습니다. 어리석은 소는 그게 별인줄 알았습니다. 소는 감나무에게 찾아가서 자신이 만든 빛을 보여줬습니다. 그러자 감나무는 감을 하나 주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소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산을 향해 돌진했습니다. 그들의 뿔은 조금씩 닳기 시작했고, 그들의 눈에는 그것이 별로 보였습니다. 별을 가져올 때마다 감나무는 감을 하나씩 주었습니다. 소들은 자신들의 뿔이 부스러지고 있다는 걸 조금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저 별을 만들어 달콤한 반시를 먹어야겠다는 생각만이 가득했습니다. 황소들의 뿔이 점점 닳자 하늘과 땅을 흔드는 소리도 점점 작아졌습니다. 그리고 적중산에는 커다란 구멍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적중산 중턱에는 아주 커다란 구멍이 뚫려버렸습니다. 그러자 소들은 서로의 뿔을 향해 돌진했습니다. 그들의 뿔은 점점 더 빨리 닳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들의 날렵하게 크던 뿔은 아주 작아 흔적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소들이 아무리 세게 부딪혀도 하늘과 땅이 울리지 않았어요. 청도는 평화로워졌습니다. 하지만 소들은 멈추지 않고 별을 만들기 위해 서로의 뿔을 향해 달려들었습니다.
그리고 소들은 어떻게 되었냐고요? 지금도 소들은 별을 만들기 위해 서로의 뿔을 맞대고 있답니다. 사람들은 소들이 만들던 별들을 기리기 위해 빛 축제를 열기 시작했습니다.
“당신, 그것 좀 내려놓을 수 없어요?”
한 달 전, 오랜 직장 생활을 마치고 쉬게 되신 아버지는 저녁을 먹자마자 또 통기타를 잡으셨다. 퇴직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얼큰하게 취하셔서 집으로 돌아오신 아버지의 등에 난데없이 업혀 있던 바로 그 기타다.
“기억 안 나? 내가 왕년엔 기타로 아주 날렸잖어, 민정이 엄마!”
“그건 왕년 얘기고!”
어머니의 반격에 나는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그 말 그대로였다. 예전엔 아주 잘 치셨다지만, 수십 년 동안 한 번도 기타를 연주한 적이 없는 아버지의 솜씨는 엉망진창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오랜만에 기타를 잡았다는 사실이 마냥 좋으신 모양이었다. 내게 부탁하셔서 MP3에 가곡들을 잔뜩 다운로드 받으신 것은 물론이고, 7080 콘서트 프로그램 시간을 미리 적어두었다가 꼬박꼬박 챙겨보시기도 하셨다.
“어휴, 얘. 난 네 아빠 기타 소리 때문에 죽겠어, 아주.”
말씀은 항상 그렇게 하시지만, 나는 어머니는 아버지가 기타 치는 모습을 바라보시는 것을 은근히 좋아하신다. 젊은 시절의 어머니는 대학 캠퍼스의 잔디밭에서 기타를 치고 계시던 아버지의 모습에 반했다고 하셨다. 옛날 드라마나 소설 등에서 상징처럼 등장하는 바로 그 모습, 바로 흰 티에 청바지를 입고 장발을 한 채로 잔디밭에서 기타를 연주하던 모습 말이다. 문학소녀였던 어머니는 소설처럼 아버지에게 첫 눈에 반했고, 매일 먼 발치에서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는 어머니의 존재를 눈치 챈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먼저 다가가서 말을 거셨다고 했다.
“왜, 낭만적이고 좋은데.”
“다 늙어가지고 낭만은 무슨. 예전처럼 잘 치는 것도 아니고 하루 종일 저걸 듣고 있자니 고역이다, 야. 저 양반, 내일이 결혼기념일이라는 것도 까먹은 건 아닌지 몰라.”
어머니의 말에 나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독립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맞는 부모님의 기념일인 만큼, 올해는 꼭 내 손으로 챙겨드리고자 다짐했던 일이 떠오른 것이다.
“여보, 민정이 엄마. 이리 좀 와 봐. 티비에 지금 누군 나오는지 알아?”
나는 들어본 적도 없는 이름이었지만, 어머니에게도 익숙한 이름인 듯 어머니가 텔레비전 앞으로 달려가셨다. 서로 어깨를 기대고 앉아 노래를 따라 부르시는 모습이 정겨워 한참을 바라보고 있다가 나는 무릎을 탁 쳤다.
“대체 어딜 가는 거냐?”
“가 보시면 다 알아요.”
저녁 식사 때 자르실 요량으로 아버지께서 사 오신 케이크를 그대로 조수석에 싣고, 나는 부모님을 모시고 미사리로 향했다. 서울 근교에 라이브 카페촌이 있다는 말을 들은 것이 기억 나 어제 부랴부랴 검색을 해 보았더니, 꽤나 유명한 곳인데다가 생각보다 가까웠다.
서두른다는 것이 예약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도착해버렸기에, 조정 경기장에 차를 세웠다. 운이 좋으면 모터보트 경기를 눈앞에서 볼 수 있다는데, 오늘은 시간이 맞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잔디밭과 꽃나무로 꾸며진 경정공원과 산책로, 솟대가 데이트코스로는 아주 그만이었다.
나는 아버지 몰래 어머니에게 예약된 카페의 전화번호와 약도를 건네 드렸다. 어머니는 초대 가수의 이름을 듣고는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하셨다.
“네 아버지 알면 아마 여기서 춤을 추실 거다.”
“그럼, 방해꾼은 이만 빠질게요. 한 삼십 분 있다가 이 길 따라서 쭉 걸어가시면 돼요.”
공연이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카페 앞으로 두 분을 모시러 갈 것을 약속한 나는 혼자 자전거를 빌렸다. 공도교까지 이어지는 자전거 도로를 따라 갔다 오면 얼추 시간이 맞을 것 같았다. 한강변을 따라 자전거로 달리는 동안 종종 팔짱을 꼭 끼고 걷는 어르신들이 보였다. 아버지가 즐겨 부르시는 노래 가사처럼, 추억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괜찮아. 내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긍정적인 말이었다. 말. 단지 말뿐이었다. 조금 느린 것뿐이라고 괜찮다고.
우리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 조금 다르다고 느낀 건 아이가 다섯 살 무렵이었다. 아이는 자동차, 인형, 기차 등 많은 장난감들 사이에서도 말 모양 인형을 가장 아꼈다. 럭키라는 이름도 지어주며 잘 때도 밥을 먹을 때도 항상 럭키와 함께했다. 아이가 말에 대한 강한 애착이 있다고 생각했지 그것이 자폐아이의 보편적인 특징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내 아이가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기까지 나도 남편도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아이에게서 말 인형을 빼앗아 숨긴 적도 있었다. 말 인형이 보이지 않으면 다른 아이들처럼 한 곳에 집착하지 않고 차츰차츰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싶어서였다. 점점 아이의 불안증세가 깊어지고 말 인형을 찾아 온 집안을 헤집고 다니는 통에 결국 두 손을 든 것은 나였다.
아이에게 말이 그렇게 좋으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이 아니라 럭키라고 했다. 그러니까 이 동물이 말이잖아라고 타일러봐도 아이는 고집 있는 말투로 말이 아니라 럭키라고 했다. 결국 또 그래, 럭키. 라고 대답을 한 나다.
아이가 말을 좋아하니 남편은 이제 아이의 상태를 받아들이자고 말했다. 그리고는 주말에 아이가 좋아하는 말을 보러 가자고 했다. 아이가 뛸 듯이 좋아할 것을 생각하니 엷은 웃음이 지어졌다. 분명 많은 말들을 보고 다 럭키라고 부르겠지라고 생각했다.
아이는 지금 10살이다. 태어나서 살아있는 말을 처음 보아서일까 아니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럭키를 닮은 것들이 하나도 아니고 여러 마리가 눈앞에 펼쳐져서 신기해서일까 아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계속 감탄사만 연발하였다. 남편은 다정하게 아이의 손을 잡고 말을 쓰다듬어보기도 하고 말과 교감을 나누는 법을 알려주었다. 아이도 무서워하지 않고 말과 교감을 나누었다.
“아들, 여기는 말 정말 많다. 그치? 말 어때? 다 럭키처럼 보여?”
“아니. 난 이 말이 가장 마음에 들어요. 이 아이만 럭키라고 불러줄거야.”
아이는 뜻밖에도 말 한 마리를 콕 집어 말했다. 말이라면 다 좋아할 줄 알았는데 유난히 마음에 든 말이 있는 모양이다.
아이가 어떤 결정이나 선택을 한 것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지나온 순간에는 그저 엄마인 내가 이건 좋지? 이건 별로다 안 그래? 이런 식으로 아이의 선택을 나 스스로 해왔다. 그것이 아이의 결정인양. 아이의 선택이나 생각은 뒷전이었다. 알면서도 아이의 상태를 내세워 그렇게 살아온 것이 미안해졌다. 충분히 결정하고 선택할 수 있는 아이였는데 말이다.
날이 어두워졌다. 이제 그만 진짜 말인 럭키와 작별인사를 나누어야 할 때였다. 아이도 헤어짐을 아는지 더 있겠다는 떼를 쓰지 않고 말과 인사를 나누었다. 잘 있으라며 또 보러 오겠다고했다. 작은 손바닥위에 각설탕을 올려놓고 말이 먹을 수 있도록 손을 뻗어주었다.
마사에서 나와 아이를 데리고 별을 관측할 수 있는 천문대로 향했다. 아이에게 천천히 우리가 별을 보러 오는 것이라고 설명해주었다. 아이는 반짝반짝이라고 대답했다.
그래 반짝반짝.
요즘처럼 선선한 가을에 보이는 별자리는 무엇인지 간단히 설명을 들은 후 무엇이 보이냐고 물어보았다. 아이가 말이 보인다고 했다. 말? 아이의 머릿속에는 온통 말로 가득한 것 같았다.
“아! 페가수스자리를 본 모양이구나?”
페가수스자리가 말 모양을 했다고 해도 저렇게 큰 하늘을 수놓는 별자리로 말을 떠올리긴 힘들 텐데.
“우리아들 대단하네.”
아이에게 참 오랜만에 대단하다고 칭찬을 한 것 같다. 아이는 쑥스러운지 머리를 긁적이며 웃어보였다.
엄마한테는 짭조름한 냄새가 난다. 그것은 땀 냄새도 아니고 엄마 한테서만 풍기는 엄마냄새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슈퍼맘이나 워킹맘이라는 단어가 선풍적으로 쓰인 때가 있었다. 육아와 직장생활을 병행하는 엄마들로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지 않는 슈퍼우먼을 뜻하는 말이었다. 나는 엄마를 생각하며 우리 엄마가 슈퍼맘이 아닐까 생각을 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로 자식들을 키워야 했기 때문이다. 거의 대부분의 슈퍼맘들은 자신의 선택으로 슈퍼맘의 길에 접어들었겠지만 우리 엄마는 등 떠밀려 슈퍼맘이 되어야했다. 자식들을 굶기지 않고 공부시키려고 엄마는 참 열심히 일했다.
처음부터 식당을 개업한 것은 아니었다. 동네의 조금 큰 한식당에서 주방 설거지를 하고 홀 서빙 일부터 시작했다. 식당이 문을 여는 아침 일찍부터 나가서 식당이 문을 닫는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엄마는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의 손은 항상 부르트고 거칠었다. 사실 엄마와 같이 살면서도 함께 시간을 보낸 기억은 거의 없었다. 학교에 가려고 일어나면 엄마는 이미 식당에 가신 후라 아침상만 덩그러니 있었고 밤에는 엄마를 기다리다 먼저 잠든 적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해를 더 식당에서 일을 한 엄마는 이듬해 봄에 작은 한식당을 열었다. 식당에서 음식판매뿐 아니라 반찬을 함께 팔기도 했다.
엄마는 외할머니를 닮아 요리솜씨가 있다고 했다. 엄마는 음식에 있어서 간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며 소금을 가장 깐깐하게 생각했다. 엄마는 메인 요리와 함께 나가는 밑반찬들을 직접 만들었으며 식당을 찾는 사람들은 밑반찬이 깔끔하고 맛있다며 종종 구매해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환갑을 바라보는 연세에도 계속 일을 고집하는 엄마에게 이제 그만 쉬라고 말을 꺼낸 적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사람이 하던 일을 안 하고 집안에만 있으면 빨리 늙는 거라고 했다. 하긴 지금까지 엄마의 삶에는 조금의 쉼도 없었다. 늘 바쁘고 억척스럽게 살아왔던 삶이라 여유라는 쉼이 엄마에겐 어떤 것보다 낯설기도 할 것이다. 엄마의 삶을 봐왔던 동네 아주머니들은 누가 짠돌이 아지매 아니랄까봐 자식농사 풍년인데 뭣하러 지금까지 고생이냐고 했고, 엄마는 “짠돌이 어디 가나요. 그러지 말고 계모임 같은 거 있으면 다른 식당 가지 말고 우리 식당으로 와요”하며 웃음만 지었다.
사람들은 엄마를 짠돌이 아지매라 불렀다. 엄마와 나의 공통점을 찾으라면 아마 짠돌이라는 별명에서 일 것이다. 엄마는 내가 초등학생 때부터 용돈을 참 적게 주셨다. 그래서 돈을 아끼고 아껴야만 겨우 학교 준비물을 살 수 있을 정도였다. 학교 문구점에서 파는 100원 200원짜리 불량식품도 내겐 사치였다. 그렇게 지내다보니 고등학교 때까지 내 별명은 짠돌이였다. 물론 지금도 짠돌이라고 부르는 친구들이 있다. 지금은 여유 있는 생활을 할 만큼 벌이가 괜찮아 졌지만 여전히 돈을 허투루 쓴 적이 없다. 아마 나도 나이가 들면 엄마처럼 짠돌이 아지매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침부터 엄마가 분주한 걸 보니 반찬으로 나갈 배추겉절이와 오이소박이, 각종 나물을 만들려는 모양이었다. 가끔 회사에 월차를 내는 날이면 엄마를 도와 반찬을 만들며 식당일을 돕는다. 엄마는 반찬을 만들 때에도 항상 ‘소금’의 중요성을 연설했다. 싱싱하고 좋은 재료만큼 음식의 풍미를 돋우어주는 소금의 선택이 맛을 좌우한다고 했다. 그래서 엄마는 신안에서도 가장 좋은 천일염만을 고집했다. 나는 이런 좋은 소금 쓴다고 누가 알아주기나 하냐고 했지만 엄마는 식당을 찾는 손님들의 입맛은 귀신보다 더 무서운 법이라고 했다. 간 하나에 발길이 이어지고 끊기는 일이 다반사였고 칭찬과 쓴 소리가 좌우되는 것이라고 했다. 질 낮은 소금을 쓰면 음식이 텁텁하고 쓴 맛이 감돌며 질 좋은 천일염을 쓰면 깔끔하고 풍미 있는 깊은 맛을 낸다고 했다.
엄마의 고집은 소금만큼이나 짭짤했다. 질 좋은 소금을 써서 일까 사람들은 엄마의 음식솜씨를 칭찬했고 ‘짠돌이 아지매’ 식당을 찾는 사람들도 부쩍 많아졌다.
엄마가 일을 갔다 돌아오면 엄마 특유의 짙은 냄새가 났다. 엄마에게 풍기는 짭조름한 냄새도 질 좋은 천일염처럼 기분 좋은 엄마 고유의 냄새로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