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할아버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짜증이 많고 늘 우울해하셨으며, 전쟁 때 팔 한 쪽을 잃어 보기 흉한 외모를 하고 있었다. 입만 여시면 세상을, 정부를,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저주하고 비관하는 말만을 하셨기에 할아버지 댁에 방문하는 것은 낙천주의자인 내게는 꽤나 고역이었다. 자식들이 모두 성공한데다가 할아버지를 극진히 모셔서, 생활비로 쓰고도 저축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돈이 매달 들어오시는데도 굳이 불편한 몸으로 밭을 일구시는 억척스러운 면도 싫었다. 술을 드신 날이면 좋은 옷을 입은 자식들이며 손주들에게 손가락질을 하시며 우셨고, 서울에 사시는 것을 한사코 마다하시고 먼 김포땅 끝자락에 집을 지으셨다. 어렸던 나는, 그 괴팍한 성미의 할아버지에게 어른들이 한 번도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린 적이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할아버지가 지난 해 겨울에 갑자기 돌아가셨다. 술에 잔뜩 취하셔서 집으로 돌아오시다 넘어지셨는데, 그만 일어나지 못하시고 동사하셨다고 했다. 할아버지의 유골을 강에 뿌리고 돌아오던 날,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기일마다 애기봉에 오를 것을 제안하셨다.
“왜 하필 산에 올라요?”
아버지는 내가 아주 어려서부터 할아버지를 무서워하고 피하기만 하는 통에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줄 기회가 없었다고 하시며 긴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그리고 나는 그 때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할아버지가 실향민이며, 할머니를 북쪽에 두고 오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쟁 중에 한쪽 팔을 잃은 할아버지는 아내와 아이들을 부탁했던 친구 집을 찾았다. 아내가 달려 나와 자신을 맞아 줄 줄로만 알았는데, 그곳에는 아이들뿐이었다. 할머니는 아이들을 감싸다 크게 다쳐 도저히 남으로 넘어올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그냥 자신을 버리고 아이들을 데리고 도망치라고 하셨고, 워낙에 급박한 상황에 친구네 가족은 할머니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아이들만을 겨우 챙겨 남으로 넘어왔다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불편하신 몸으로 아버지와 작은아버지 형제를 열심히 키우셨지만, 한편으로는 북에 두고 온 할머니 생각에 매일같이 괴로워하셨다고 한다. 돌아가셨으면 시신 수습도 제대로 못 한 것이, 살아 계시면 외롭게 혼자 살아 계실 것이 걱정이셨다. 자식들이 성공하면 성공할수록, 돈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북한에 계실 할머니 걱정에 마음이 편치 않아 하셨다고 한다.
애기봉은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곳에 있었다. 애기봉 전망대에 오르면 강 너머의 북한에 있는 마을까지도 맨눈으로 건너다 볼 수 있었는데, 텔레비전에서나 접하던 북한의 모습이 바로 눈앞에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애기봉이라는 이름은 병자호란 때 혼자 강을 넘어 피신한 기생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애기라는 이름을 가진 이 기생은 평양 감사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는데, 자신만 강을 건너고 평양 감사는 그대로 청나라에 잡혀가자 감사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다가 이 봉우리에서 죽었다고 한다. 후에 이것이 이산가족의 모습 같다며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 이름 없는 봉우리에 애기봉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했다.
나는 어쩌면 할아버지도 할머니가 어느 날 갑자기 꿈처럼 강을 건너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장난감을 들고 있던 내게 손가락질을 하며 우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때 그 손을 잡아드릴 수 있었다면 할아버지는 울음을 그치셨을까. 할아버지의 고개. 나는 애기봉에 그런 이름을 붙여 보기로 했다.
주말의 밤은 언제나 시끌시끌하다. 극장 앞은 아직도 오늘 공연에 대해 찬사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극장 안으로 들어와 앉았다. 긴장과 환호성, 불빛이 가득한 아름다운 극장의 모습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만, 사람들이 모두 돌아가고 난 뒤의 조용한 극장의 모습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입장권을 비롯한 자질구레한 쓰레기들이 나뒹구는 가운데서, 나는 재빨리 다음 공연을 위해 연필을 놀렸다.
“윤 작가님, 벌써 또 시작하셨어. 하여튼 못 말린다니까.”
무대 철거를 위해 분주히 움직이던 스탭들 가운데서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나도 그 쪽을 보고 씩 웃어 주었다.
내가 이곳에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 지도 어느 새 삼 년.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여 순수 예술을 하겠다고 큰소리를 치던 내 기가 꺾인 지도 삼 년이 지났다.
삼 년 전, 나는 내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예술을 하던 꽉 막힌 예술인들 중 한 명이었다. 나는 내 손끝에서 탄생한 시나리오가 시처럼 아름답고 고상한 언어들로 가득 차 있길 바랐다. 정작 요즘엔 시인들도 그런 아집에 갇힌 언어들을 사용하기를 거부한다는 것을 알게 된 지도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여하튼, 나는 내가 배워 온 모든 것들이 아까워 견딜 수가 없었다. 어깨 너머로 배운 철학이나 심리학 따위로 내 시나리오의 절반 이상을 채워야 직성이 풀렸고, 어쩌다 한 번씩 내 시나리오로 공연을 올리게 되면 무지한 관중들에 대한 분노로 밤새 술을 마셔야 했다.
“연극에 대해, 시나리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내 공연을 보러 오니 당연히 반응이 시원찮을 수밖에 없지!”
연극계에서 꽤나 입지를 굳힌 선배들이 조언이랍시고 내 놓는 대중성에 대한 문제는 도무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네가 관객과 함께 호흡하는 법을 조금만 배운다면 이렇게 힘들어하지 않을 텐데.”
그런 말을 들으면 나는 선배들도 똑같다며 테이블을 뒤엎기 십상이었다.
그러던 나를 바꾼 것이 바로 이 극장에서 우연히 보게 된 마임 공연이었다. 선배들이 하나같이 말하던 관객과의 호흡. 그 날도 모니터의 하얗게 빈 화면 위에서 홀로 깜빡이는 커서만을 바라보다가, 내게는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그 호흡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찾은 극장이 바로 이 곳. 작은 극장 돌체였다.
처음 보는 마임 공연은 내게 있어 충격 그 자체였다. 무대 위의 피에로와 어릿광대들이 펼치는 공연은 내가 그렇게 집착해 왔던 언어의 아름다움을 완전히 무시한 공연이었던 것이다. 한껏 무게를 잡은 채 절규하거나 눈물을 흘리는 비극의 주인공들 대신에 외발자전거를 타거나 저글링을 하고, 마술을 선보이는 광대들로 채워진 무대 앞에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게다가 공연에 대한 예의를 갖추어 침묵을 지켜야 할 관객들은 여기저기서 손뼉을 치며 깔깔대며 웃고 있었다.
뭐 이런 공연이 다 있나 싶어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찰나, 풍선을 불던 어릿광대 하나가 다가와 내게 풍선으로 만든 꽃을 하나 건네주었다. 아이들이 부러움에 가득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어찌할 줄을 모르고 서 있던 나를 내버려둔 채 어릿광대는 무대로 다시 돌아가 버렸다. 그게 이 극장과 나의 첫 번째 이야기다.
“아니, 어떻게 그런 곳이 다 있어?”
분노가 섞여 있는 내 물음에 선배가 웃음을 터뜨렸다.
“거긴 원래 장애인이나 다문화 가정이나, 아니면 청소년들이 참여할 수 있는 연극도 많이 올라 와. 인천 클라운 마임 축제도 거기서 열리고.”
“대체 비전문가들을 왜 무대에 올려? 전문 연극인들만으로도 어려운데.”
내 물음에 선배는 네가 처음에 왜 글을 쓰겠다고 다짐했는지를 떠올려 보라고 대답했다. 그 순간, 나는 기이한 풍경을 보게 되었다. 시나리오를 쓰는 대여섯 명의 고정 멤버가 한 달에 한두 번씩 모이는 그 술자리에서, 나를 뺀 모두가 아주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오직 나만이 세상의 모든 걱정 근심을 다 지고 있는 양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나는 내가 쓴 시나리오 한 편을 들고 이 극장을 다시 찾았다. 그 동안 써 온 수십 개의 시나리오를 모두 버렸기에, 나는 이것을 내 첫 번째 시나리오라고 소개했었다.
내 첫 시나리오로 공연이 올라가던 날, 나는 이 극장을 처음 찾았던 날처럼 관객 틈에 앉아 있었다. 이미 정해져 있는 무대 위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동안, 무대와 관객들이 함께 만드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태어나고 있었다.
남루한 옷차림의 여자는 급히 검은색 자동차에 올라탔다. 고급스런 자동차와는 어울리지 않는 여자는 머리카락이 늘어져 더 초라해보였다. 여자가 차에 올라 탈 때 차 문을 열어준 남자에게 무언가 이야기 할 때 남자가 짧게 ‘하이’라고 하는 것 보니 일본인 같았다.
달빛이 힘을 잃어 어스름했다. 낡았지만 붉은 빛이 선명한 벽돌 건물 앞에 여자는 멈추어 섰다. 여자는 차 안에서 머리를 빗었는지 아까보단 단정해보였다.
차마 붉은 벽돌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 문 밖만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러더니 여자는 다시 자동차에 올랐다.
다음날 오전은 유난히 볕이 따가웠다. 선글라스나 모자 없이는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힘들도록 쾌청한 하늘은 뜨거운 여름을 실감나게 했다. 어제 본 검은색 자동차가 다시금 붉은 벽돌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오늘은 여자 혼자가 아니라 웬 꼬마아이와 함께였다. 아마 여자의 아들이라 생각했다. 여자는 어제보다 단정한 차림이었다. 검정색 투피스를 차려입은 여자는 아이의 손을 잡고 붉은 벽돌 건물로 들어섰다. 표정이 사뭇 비장했다.
“타케이. 잘 봐. 오늘을 잘 기억해둬.”
여자는 한국말을 곧잘 했다. 아이는 짧게 응, 하고 대답하더니 경건한 표정으로 들어섰다.
여자가 아이의 손을 잡고 들어간 곳은 독립을 위해 싸운 애국지사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붙어있는 방이었다. 여자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는 아이의 손을 더욱 꼭 잡았다. 그리고 아이와 함께 가벼운 목례를 했다. 방을 나오고 나서는 인형으로 고문하는 장면을 재현해 놓은 곳을 들어갔다. 실제와 가까운 비명소리와 인형의 모습에 타케이는 제법 놀란 모양이었다. 무서웠는지 여자의 뒤로 숨으며 나가고 싶어 했다.
“타케이. 무섭니? 하지만 기억해야해. 잊어버리면 안 돼.”
무서워하는 타케이의 손을 잡고 건물 건물을 찬찬히 돌아보았다. 날이 쾌청해서 그런지 제법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들렸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음에도 소란스럽지 않았다. 그 중에서는 이들과 같은 외국인들도 더러 눈에 띄었다. 그들은 다른 나라의 뼈아픈 역사의 한 페이지에 엄숙함을 표했다.
타케이는 여전히 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한 곳을 응시하더니 발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유관순 열사의 사진이 붙어있는 곳이었다.
“타케이. 유관순 열사 알지? 이분이 여기에서 돌아가셨어. 나라를 위해 독립운동을 하다가 돌아가신 분이야.”
타케이는 그러고도 한참을 멍하니 사진만 바라보았다.
아마 감옥이라는 곳은 죄가 있는 사람들이 가는 곳인데 나라를 위해 싸운 사람들이 왜 감옥에 갇혔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여자는 다시 한 번 가볍게 고개를 숙인 채 아이와 함께 검은 차에 올라탔다. 조용한 발걸음이라 다녀간 흔적도 없이 고요하게 사라졌다.
차안에서 여자를 모시고 가는 남자가 물었다.
“이곳을 이렇게 자주 찾는 이유가 있으신지요. 타케이까지 데리고.”
“당연히 와보아야 하는 곳이니까요. 당연히 알아야 하고.”
“그래도…….”
“유타, 여기에 계신 분들은 자유와 평화를 위해 그리고 빼앗긴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운 사람들이에요. 우리는 그들의 뼈아픈 외마디 비명에 귀를 기울여야 할 의무가 있어요. 잇몸이 문드러져 이가 으스러져도 소리 한번 힘껏 지르지도 못한 분들이라고요.
지나간 시간이고 흘러버린 역사라고 해서 모른 척 눈을 돌리는 건 비겁해요. 좁고 어두운 무서운 곳에서 두꺼운 철제 창이 열리기만을 바라던 사람들의 핏물 섞인 소리를 들어야 해요.”
여자는 자신이 말을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낡은 지갑 속 흑백사진을 말없이 꺼내볼 뿐이었다.
내가 참 좋아하는 소리들 몇 가지가 있다. 보글보글 끓던 어머니의 된장찌개 소리, 지글지글 삼겹살이 익는 소리, 뎅그렁 하는 풍경 소리,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몽돌해변의 자갈 소리다.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던 사람들이 ‘엥?’하며 반문해 오는 것이 바로 이 마지막 소리. 몽돌해변 자체를 모르는 것이다.
“야, 너희들이 해변을 몰라서 그래. 해변 그리라고 하면 모래사장만 그리지? 이 형님이 알고 있는 해변은 말이야…….”
말 그대로 주변에는 의외로 모래로 덮인 해변만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한 번 빠지면 빠져 나올 수 없는 매력을 지닌 것이 바로 이 몽돌해변, 그 중에서도 몽돌들이 파도에 구르면서 나는 자그락자그락 하는 소리다.
나는 몽돌해변 변두리의 작은 마을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이천 년대 초반, 아이들은 아직 컴퓨터로 게임을 하거나 인터넷을 사용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고마운 일이다. 그래서 매일 방과 후에 동네 아이들과 함께 몽돌 위를 달릴 수 있었으니 말이다.
어렸을 때에는 친구들과 함께 있으면 뭐든 재미있다는 말이 맞다. 예쁜 색의 몽돌을 찾는 것도, 제일 큰 몽돌을 찾아오는 것도, 똑같이 생긴 몽돌을 찾는 것도 모두 재미있는 놀이가 되었다.
그런데 해가 넘어가기 시작해 아이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간 뒤에도 나는 여전히 몽돌해변에 있었다. 다른 지방에서 장사를 하셨던 부모님은 노을이 다 진 뒤에야 돌아오셨다. 혼자 집에 있는 게 무서웠던 깡마른 초등학생 꼬마는 몽돌해변에 앉았다.
자그락자그락, 파도가 몽돌 새를 스치며 묘한 소리를 냈다. 쌀을 씻는 소리 같기도 하고, 조개껍질이 부딪히는 소리 같기도 했다. 햇볕에 따뜻하게 데워진 몽돌 위에 누워, 나는 한참이나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번 여행은 몽돌해변으로 가자.”
여름방학을 맞아 여행 계획을 세우기 위해 모인 것이었는데, 난데없는 추억 얘기가 길어졌다. 머쓱해진 나는 ‘달궈진 모래에 몸을 파묻는 장난은 칠 수 없겠지만, 따뜻한 몽돌 위에 누워 있으면 온돌 침대가 따로 없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러자! 재미있겠는데? 나도 정동진이나 해운대 같이 예쁘기로 소문난 해변은 많이 가 봤는데, 몽돌해변은 한 번도 안 가봤어.”
그런데 내 얘기에 빠져 있던 친구들이 모두 오케이 사인을 보내 왔다. 몽돌해변이 뭔지 모르는 친구들이 절반은 됐는데, 몽돌해변에 가 본 친구들이 줄줄이 말을 잇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앉은 자리가 몽돌해변 이야기로 들썩였다.
“몽돌이면 조약돌 같은 거지? 이름 정말 예쁘다. 돌 하나 주워 와도 돼?”
“당연히 안 되지, 임마. 너 같은 사람들 때문에 해변이 없어지는 거야. 대학생씩이나 돼 가지고 자연 망칠 생각부터 해?”
독설가로 소문 난 영민이의 말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어쨌거나, 나는 이렇게 해서 얼떨결에 몽돌해변에 가 보게 되었다.
울산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깜빡 잠이 든 나는 꿈을 꾸었다. 나는 오렌지 빛깔의 노을과 흑진주 같은 몽돌 사이에 누워 하루의 마지막 볕을 쬐고 있었다. 자그락자그락, 아이들의 작은 발이 몽돌 위를 달린다.
어디선가 ‘현규야, 밥 먹자!’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다. 그 목소리도, 몽돌의 온기도 아주 따뜻했기 때문에 나는 꿈속에서 또 잠이 들어버렸다.
월출산에 올 때부터 이상하긴 했다. ‘달이 떠오르는 산’이라길래 이름마냥 고요하고 아름다울줄 알았는데, 웬걸, 기암절벽에 바위 천지, 산세는 또 어찌나 험한지!
“이 산이 원래 이렇게 험한 거야, 아님 내가 가는 이 코스만 험한 거야?”
그는 스마트폰을 꺼내어 검색을 시작했다.
“월출산, 우리나라에서 풍수지리상으로 기세가 가장 센 산? 아, 내가 잘못 골라도 한참 잘못 골랐구만. 게다가 구름다리 코스가 가장 난코스? 아아악, 젠장!”
당장이라도 휴대전화를 던져버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이따 아내와 통화를 해야 하니까. 싸우고 꼴 보기 싫어도, 집에는 같이 가야한다. 한 집에 사는 사람이라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이렇게 꼬일 줄 알았으면 아내와는 같이 안왔을텐데. 그는 지금 후회하고 있었다.
그의 아내는 처음부터 월출산에 가는 걸 싫어했다. 이왕 여름휴가를 받아 쉴 거면 산 보다는 바다가 좋았다. 하지만 그는 이미 가지도 않은 산악 캠핑장에 푹 빠져 있었다. 그의 아내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망할 리얼 버라이어티가 대한민국 남자들을 전부 된장 캠퍼로 만들어 놨어...’
게다가 전국의 술이란 술은 다 먹어봐야 직성이 풀리는 그인데, 하필 영암에는 그가 아직 섭렵하지 못한 술이 있었다. 그래서 목적지는 두말할 것도 없이 영월이 됐다. 도대체 그냥 막걸리도 아니고, 무화과 막걸리가 뭐길래!
남편의 소원대로, 그들은 월출산 캠핑장에서 무화과 막걸리를 마셨다. 막걸리는 생각보다 맛이 좋았다. 처음에는 툴툴거리던 아내도 한 사발, 두 사발 받아먹더니, 혼자 한 동이를 다 비웠다. 그렇게 둘이서 세 동이쯤 먹었을까? 혀가 살짝 꼬인 채 남편이 말했다.
“야, 너는 그렇게 오기 싫어하더니, 이렇게 맛나게 출을 처마시냐? 너 인제 내가 하는 말에 토 달지마 이 여편네야.”
“야, 너 지금 말하는 스타일이 왜 그 모양이야. 너 잊었어? 난 지금도 산이 싫어. 벌레는 왜이리 많고, 저 깎아지른 듯 한 산세는 뭔데? 네가 언제 내가 원하는 대로 말 들어준 적이나 있어? 내가 참아주고 사니까 이게 그걸 당연한 줄 알아. 뭐 그리고 술을 쳐 마셔? 그래, 나 아주 상스럽게 처마시고 있다. 너 때문에 열 받아서 술이 아주 그냥 술술 들어간다. 됐냐?”
사실 남편은 말을 입 밖으로 뱉는 순간부터 후회하고 있었다.
‘내가 미쳤지. 아, 입이 방정이다. 오늘 분위기잡고 첫째 만들려고 했는데, 이거 뭐 분위기고 뭐고, 내일 무사히 집에나 갈 수 있음 다행이게.’
결국 아내는 텐트에서, 그는 해먹에서 잤다. 2세 만들기는 생각조차 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함께 나란히 오르기로 한 월출산을 따로 나섰다. 아내는 바람폭포 쪽으로, 남편은 구름다리 쪽으로.
월출산 캠핑장에서 구름다리까지 걸어서 한 시간 정도 걸렸다. 그러나 구름다리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는 이미 후회하고 있었다. 이 어마어마한 산새는 무엇인가; 한 시간 밖에 안 걸었는데도 다리에서 힘이 풀리고 있었다. 게다가 남들은 고어텍스 옷이며 등산용 스틱이며 만반의 준비를 하며 걷는데, 그의 무기는 달랑 등산화뿐이었다. 걷다가 벌써 생명의 위협을 몇 번이나 느꼈던가! 긴장감에 물을 마구 들이켰더니, 물도 벌써 다 떨어져가고 있었다.
구름다리는 정말 장관이었다. 밥로스 아저씨가 나이프로 휙휙 휘저어 그린 듯한 바위절벽 사이에 끝도 보이지 않게 긴 다리가 있었다. 어마어마한 공포가 밀려왔다. 한참동안 다리 입구에서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두 손으로 난간을 꼭 잡은 채 한 발 두 발 걸어갔다. 다리가 덜덜 떨렸다. 경치는커녕 눈을 어디에도 돌릴 수 없었다. 간신히 눈을 돌려 난간을 잡은 자신의 손끝을 바라보다, 그는 깜짝 놀랐다. 난간에는 매직으로 네 글자가 적혀있었다. ‘떨어져라.’
그는 꽁지에 모터가 달린 듯 건너편을 향해 걸어갔다. 차원이 다른 공포였다. 산의 기운이 짓누르기 전에 산과 산을 잇는 이 허공에서 도망가야 할 것 같았다. 그는 민망할 정도로 빠르게 구름다리 건너편에 도착했다. 그리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전화기를 꺼냈다.
“뚜르르르르... 뚜르르르르... 딸칵. 왜?”
“너 어디야, 바람폭포야?”
“아니, 나 천황봉 거의 다 왔는데? 이제 내려갈 거야. 끊어.”
“야야야야야! 너! 아니, 미안하다.”
“너 왜 그래, 약먹었어?”
아내의 목소리를 듣자 그는 오만생각이 떠올랐다.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순간에 떠오르는 건 역시 마누라밖에 없구나. 지가 아무리 기가 세고 바가지를 긁는들 그 기운이 월출산만큼 뻗치진 않으니. 적어도 생명의 위협을 느끼진 아니하잖나. 악처라도 처가 있는 게 낫다고, 감사하며 살자.
“아냐. 생각해보니까 그냥 미안해서. 나 인제 구름다리니까 조금만 기다려. 사랑한다.”
“놀고 있네... 빨리와. 투둑. 뚜.뚜.뚜.뚜...”
볕이 좋은 주말 오후에도 체육관은 기합소리와 땀 냄새로 그득하다. 여기 모인 사람들이 가슴에 태극마크 하나씩 달고 저마다의 목적을 위해 운동을 한다. 하나같이 종목들과 운동을 하는 이유는 다 다르지만 ‘국가대표’라는 직분은 같기에 오늘도 기합소리가 새어나온다. 그들은 힘이 들어도 힘들다는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고 몸이 뒤틀리는 고통을 웃음으로 넘긴다. 4년의 기다림을 알기에 그들은 참고 또 참는다. 누군가는 메달이라는 상징물 혹은 4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큰 세계적 이슈로 보겠지만 그것은 누군가의 희망이 될 수도 나라의 미래일수도 또 다른 의미에서는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다 쓰러지겠어. 메달 따고 싶어 하는 맘은 나도 알겠는데 그래도 컨디션 조절이 제일 중요하다는 거 몰라?”
“나 메달 따려고 이러는 거 아니야.”
“메달 따려고 그러는 것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몸을 힘들게 해. 좀 쉬었다 하자.”
한준은 몸에 땀이 비 오듯 흘러 운동복이 흠뻑 젖었다. 파트너 희진의 만류에 겨우 기구를 내려놓았다.
미지근한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는 한준에게 희진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어머니 때문에 그렇지?”
“무슨 소리야 그게.”
“한준이 너, 어머니 찾겠다고 그러는 거잖아. 메달 따서 당당하게 찾아뵈려고. 아니야?”
한준의 부모님은 한준이 12살이 되던 해에 각자의 삶을 살기로 하였고 한준은 아버지를 따라가야 했다. 그 이후로 한준은 어머니를 자주 볼 수 없었다. 20살이 되던 해에 국가대표로 선발되면서 태릉선수촌에 들어왔다. 그 이후로는 어머니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 한준은 메달을 따고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었을 때 당당한 모습으로 어머니를 만나러 가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주말이나 휴일에도 오로지 운동만 했다. 나라를 위해서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저 어머니 하나만을 위한 피땀 어린 노력이었다.
“배고프지 않아? 오늘은 주말이고 사람도 별로 없으니까 우리 나가서 먹자. 외식하자 외식.”
생각 없다는 한준을 억지로 끌고 나왔다. 체육관을 벗어나기만 했을 뿐인데 왠지 공기마저 다르게 느껴졌다.
바깥바람을 만끽하며 걷는 희진과 달리 바닥만 보고 걷던 한준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 바로 앞에는 낡은 구두가 있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아주머니 한분이 눈물이 그렁한 채로 한준 앞에 서있었다. 서로 말을 주고받지 않았지만 한준의 어머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한준아.”
“여긴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돌아가세요.”
“저기, 한준아. 밥. 밥은 먹었니? 안 먹었으면 점심만 같이 먹고 가면 안 될까?”
둘의 관계를 알아차린 희진이 순발력을 발휘해야 했던 순간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한준이 파트너 김희진이라고 합니다. 한준이 어머님이시죠?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헤헤. 아, 마침 저희도 점심 먹으러 나가려던 참인데 제가 오늘 운동스케쥴이 있었던 걸 깜빡했지 뭐에요? 그래서 그런데 두 분 이서 식사 하고 오시면 될 것 같은데…….”
“아. 그래요? 우리 한준이 파트너 분이세요? 반가워요. 같이 식사하면 좋은데.”
“아, 아닙니다. 저는 다음에요. 한준아, 밥 맛있게 먹고 와. 나 먼저 들어간다!”
몇 년 만에 본 어머니의 얼굴은 몰라보게 야위어 있었다. 잘 살고 계시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가까이에서 마주보니 더 늙고 초라해진 모습에 마음이 아픈 한준이었다.
“한준아. 엄마가 미안해.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운동하면 힘들 텐데. 뱃속 든든하게 채우고 운동해야지.”
“국수가 먹고 싶어요. 멸치국수.”
공릉동 국수거리에서도 한참을 들어온 곳에 몇 평 안 되는 작은 가게에 들어왔다. 가게가 8평 남짓한 공간이라 더욱 밀착해서 앉게 되었다. 멸치 국수 두 그릇에 김밥 한 줄을 시켰다.
“좀 더 근사하고 든든한 거 먹지, 국수는 배 금방 꺼지는데.”
“김밥하고 먹으면 괜찮아요. 그리고...”
한참을 머뭇거리던 한준은 뒷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언제 한 번 어머니랑 여기 와보고 싶었어요. 여기 국수가 옛날에 어머니가 해주던 거랑 비슷한 맛이 나서 가끔 혼자 와서 먹고 가고 그랬거든요.”
어머니의 눈물이 국수그릇으로 똑 떨어졌다. 그동안 혼자 이곳을 찾아왔을 한준이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이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듯했다.
한준은 이제 경기 전까지 운동에 전념한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경기 끝나면 엄마가 직접 끓여주는 국수 맛보러 가겠다는 말을 용기 내어 꺼냈다. 어머니를 정류장까지 모셔다 드리고 돌아오는 길에도 여전히 한준의 귓가에는 후루룩 소리가 맴돌았다.
붉은 입술, 검은 머리카락, 깊은 눈매를 가진 여인. 초연한 눈빛이 자못 경건하기까지 하다.
사각사각 꽃잎가루를 곱게 빻는다. 사각사각 더 곱게 갈아준다. 꽃잎이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린다. 유난히 희고 맑은 피부에 분홍빛으로 분칠을 하며 단장을 한다. 붉은 입술은 꼭 다물어 더욱 붉어 보인다. 참빗을 이용하여 머리까지 곱게 빗으니 단장이 끝났다. 거울을 들여다본다. 굳게 다문 입술을 조금 더 꼭 다물어본다.
5세가 되던 해 아비는 죽었다. 아비가 죽고 난 뒤 고약한 집의 민며느리로 팔려갈 뻔하다 겨우 빠져나와 경상도 우병사가 된 최경희의 첩으로 살기까지. 수많은 전투 속에서 자결에 이른 최경희의 빈자리까지 논개는 수많은 눈물을 흘렸었다. 나라는 혼란스러웠고 피비린내는 상황 속에서 제대로 정신을 차리기도 어려웠다.
닷새 전 집안일을 돌보는 곱단이를 불러 세웠다. 전에 곱단이가 가지고 싶다고 하던 비단 천을 내밀며 네 가락지와 맞바꾸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곱단이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바꾸어 주었다.
“얼마 전 저잣거리에서도 가락지 몇 개 사지 않으셨어요? 요새 왜 이렇게 가락지에 욕심을 내신다요?”
“가락지가 예쁘지 않니? 예쁘기도 하고 단단하기도 하고.”
“단단하다고요?”
“왜 혼례를 치를 때 가락지를 주고받는 줄 아니? 그게 바로 다 부부간에 단단한 믿음과 신뢰로 살아가자는 약속 때문에 그렇단다. 그래서 이 가락지는 단단한 거지. 끊어지지 않고.”
“그런 거래요? 그래도 전 요 부드럽고 고운 비단이 더 좋구먼요.”
가락지를 받아들던 논개의 얼굴빛은 한층 어두워졌다. 열 개의 가락지가 다 채워졌다. 바람이 더욱 쌀쌀하게 불었다.
눈물은 보이지 않기로 마음먹었기에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멀리서 풍악을 울리는 소리가 들렸고 역겨운 기름 냄새와 피비린내 비슷한 냄새가 섞여 속이 울렁거렸다. 방바닥을 짚고 일어서는데 다리가 후들거렸으나 내색하지 말아야 했다. 웃는 얼굴을 하고서 손에 가락지를 끼웠다. 열 손가락 마디마디에 치장을 마쳤다. 누가 봐도 어여쁜 기생처럼 보였다.
밖은 시끄러웠다. 촉석루에서는 이미 흥이 한 판 벌어졌고 기름진 고기를 입가에 묻히고 먹는 왜장들이 보였다. 큰소리로 웃으며 술을 부어 마시는 꼴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조용히 왜장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고고하게 한쪽 다리를 올리고 분위기를 살폈다. 누구하나 술에 취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으나 쉬이 행동을 취했다가는 일을 그르치기 쉬웠기 때문에 분위기를 잘 봐야했다.
결심에 선 논개는 남강이 유유히 흐르는 낭떠러지에 요염한 얼굴을 하고 서있었다. 거나하게 술에 취한 장수들이었으나 아찔한 낭떠러지 앞이라 그런지 누구 하나 섣불리 논개 쪽으로 다가오는 이가 없었다. 그때 늠름한 체구를 가진 왜장 하나가 걸어왔다. 논개는 미소를 띠었다. 바람에 몸을 실어 왜 장수를 낚아채듯 힘껏 안았다. 술에 취한 장수는 덩치에 못 미치게 휘청거렸다. 논개는 찰나의 순간 만 길 낭떠러지 아래로 몸을 던졌다. 열 개의 가락지 사이로 손가락이 팽팽하게 늘어났다.
파도가 넘실거리는 강 속으로 두 눈을 질끈 감은 붉은 혼이 빨려 들어갔다.
‘그래서 가락지는 단단한 거지. 끊어지지 않고.’
할머니 손에서는 매운 내가 난다. 할머니 댁에 가서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면 할머니는 아이고 예쁘다 내 새끼 하면서 내 볼을 쓰다듬는다. 그때마다 매운 냄새가 코끝에 맴돌았기 때문에 안다.
엄마, 일 좀 그만하시라니까. 엄마 고집도 참. 근데 저번에 담근 고추장은 잘 됐나? 하며 은근슬쩍 장독대로 향한다. 그럼 할머니는 말없이 빛깔 좋은 고추장을 아낌없이 담아주신다. 말은 일 좀 그만하라고 하면서 매번 고춧가루와 고추장을 가질러오는 엄마는 할머니가 정말 일을 그만두시길 바라는 것일까.
할머니는 늘 손끝이 아리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마당에 널려있는 고추들을 만질 때면 더욱 그러셨다. 고추를 만지면 손끝이 아리구나. 아린 다는 뜻이 무언지는 몰랐지만 만지지 않았다. 엄마는 마트에서 파는 고추장은 쳐다도 안 봤다. 내가 우연히 마트에서 할머니네 동네에서 나오는 고추장이라고 말했을 때에도 엄마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우리 동네 유명한 고추장 장인이셨다. 도심에서 수도 없이 맛의 비결을 물었지만 할머니는 고추장을 만들 때만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어느 날인가 할머니가 엄마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병원에 가 봐야 할 것 같다는 것이었다. 엄마는 할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갔고 그때까지도 할머니에게 또 잔소리를 했다.
“거봐, 그러니까 내가 일 좀 그만하시라니까. 이게 다 일을 너무 많이 해서 그래.”
…
“노인성 치매이신 것 같습니다. 정밀한 검사를 받아봐야 알겠지만…”
의사는 전문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엄마와 할머니는 이미 충격에 의사가 말하는 뒷말이 그저 소음으로만 느껴져 미간을 찌푸렸다.
“그…. 그러니까. 치매라고요? 저희 엄마가요? 얼마나 진행된 상태인가요?”
“아, 의사 소견상 치매인 것 같으나 아직 정밀한 검사를 …”
할머니는 소신 있게 자신의 소견을 이야기하는 여의사의 말을 더 듣지 않고 일어났다.
항상 정갈하고 깐깐하게 한 길만을 고집하였던 할머니였기에 의사의 입에서 나온 치매 진단을 받아들일 수 없는 우리였다. 아니 할머니 자신이었다. 어쩐지 그런 할머니에게선 고추의 매운 냄새가 아닌 미묘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치매로 인해 가꾸지 못해서 그런 것인지 할머니조차 가장 아끼는 고추장처럼 발효되어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할머니는 고추장 다음으로 장독대를 제일 아끼셨다. 그곳에서 고추장의 맛이 깊어진다고 하셨으니까. 할머니 댁에 가면 마당에 담장을 끝으로 수십 개의 장독이 늘어서 있다. 언젠가 할머니께 이 장독대에 다 고추장이 들어있느냐며 팔짝 뛰며 신기해한 적이 있다.
할머니는 의사에게 진단을 받으시고는 장독을 하나씩 깨뜨리기 시작하셨다. 지나온 세월에 대한 분풀이였을 것이다.
엄마는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할머니는 울지 않으셨다. 그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너무 괜찮아 보일까 싶어서였을까.
장독을 세 개쯤 깨뜨리시던 할머니는 그만 자리에 주저앉으셨다. 그리고는 깨뜨린 장독에서 흘러나온 고추장을 맨손으로 매만지셨다.
“손끝이 아리구나.”
할머니의 기억은 점점 감퇴되었다. 하지만 할머니 손에서는 여전히 매운 내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