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얼마만큼의 기억을 얼마나 똑똑히 저장할 수 있을까?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태교를 통해 어떤 것을 기억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만 4세 이하의 어린 시절은 기억에 없다. 아무리 기억을 해내려고 해도 머릿속은 텅 비어 있을 것이고 기억이 나는 것 같은 착각은 아마 어릴 적 모습을 담아둔 사진첩을 통해서 유추해 낸 단편적인 조각들일 것이다.
할머니의 기억력은 점차 감퇴되셨다. 처음에는 그저 노화의 한 부분이리라 생각하셨다고 했다. 아이를 출산 하면 기억력이 조금 떨어져 자주 깜박깜박 하신다고 하는데 우리 할머니는 열 두 남매를 출산 하셨으니 그럴 만도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할머니께서 노인성 치매를 앓고 머지않아 급격히 상태가 나빠지셔서 생각보다 빨리 하늘나라로 가버리셔서 그런지 엄마는 항상 도끼빗으로 머리를 콕콕 두드리시며 전화번호가 적힌 수첩을 반복해서 읽으셨다. 그리고는 심심풀이라면서 고스톱으로 하루 점을 치시기도 하셨다. 화투가 치매예방에 좋다나. 엄마는 염려하는 것 보다 기억력이 좋았다. 어쩌면 우리 집에서 가장 많은 것을 세세하게 기억하는 사람도 엄마밖에 없다고 할 정도였다. 심지어는 내가 어렸을 때 동네에서 말 타는 아저씨를 따라 갔을 때 입었던 초록색 멜빵바지를 다 기억하고 계실 정도였다.
그런데 엄마가 너무 정신건강에만 열중을 한 탓일까 엄마를 괴롭힌 병은 머릿속이 아닌 다른 곳이었다. 엄마 몸속에 침투한 몹쓸 암덩어리. 엄마는 자궁암판정을 받았다. 의사도 엄마의 상태에 대해 급격히 나쁘다 혹은 호전될 가능성이 높다는 등의 확실한 입장을 표명하지 못했고 일단 입원을 하고 치료를 받으며 상태를 보자고 했다. 이렇게 애매한 태도를 보이는 의사의 멱살이라도 잡아끌며 당장 수술이라도 하라고 악을 쓰고 싶었지만 의사의 지나친 냉담한 태도에 그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엄마는 다른 아닌 암이라는 말에 상심이 큰 듯했다. 나는 어렸을 때 엄마가 없는 상상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그때 눈물이 날까 눈물이 나지 않을까를 생각한 적이 있다. 물론 눈물이 나겠지로 생각을 마무리했지만 이렇게 막상 엄마가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니 조그마한 눈에 눈물이 넘치도록 고였다. 엄마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집에 가서 입원을 위한 옷가지 몇 벌과 생활필수품들을 챙기고 다시 병원으로 가야 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당신 마음도 채 추스를 시간도 없이 나머지 가족들에게 어떤 말을 꺼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먼저 해야 했다. 그래서인지 엄마는 대뜸 바다가 보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바다를 갈 여건이 되지 않았기에 나는 가까운 갈치호수로 엄마를 모셨다. 엄마는 한동안 호숫가를 바라다보았다.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시고 계실까? 현재 엄마의 상황에 대한 원망의 생각일까 아니면 벌써부터 드는 두려움일까 혹은 돌아가신 할머니를 생각하고 계실지도 모른다.
“엄마, 괜찮아. 항암치료 받으면 암세포도 줄어들고 수술하고 나면 싹 다 사라질 거야. 그러니까 마음 굳게 먹고. 응?”
“응”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난 다 잘 될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하나도 안 무서워. 엄마도 그랬으면 좋겠어. 긍정적인 생각들만 하라고.”
“그래. 할머니가 보고 싶네, 갑자기.”
“갑자기 할머니는 왜. 자꾸 슬픈 소리만 할 거야? 그러지 말고 우리 저기 간장게장 집에서 맛있는 저녁이나 먹고 들어가자. 어차피 병원 들어가면 밍밍하고 싱거운 밥들만 계속 먹어야 할 텐데 오늘까지는 먹고 싶은 거 먹고 들어가서 열심히 치료받자, 응?”
“낙조가 보고 싶은데, 반월호수로 가자. 거기 가서 해 지는 것만 보고 들어가자.”
싫다는 나를 이끌고 엄마는 굳이 반월호수로 옮겼다. 마침 어둑어둑 해지더니 금세 해가 저물었다. 어쩐지 슬픈 기운이 엄마와 나 사이를 감도는 것 같아 집으로 가자고 하려던 차에 엄마는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떼었다.
“엄마, 잊어버리지 마. 그리고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도 잊어버리지 말고 다 기억해줘.”
“엄마 정말 이럴래? 자꾸 왜 슬픈 얘기만 하는 건데?”
나는 참고 있던 울음을 터뜨렸고 엄마도 흐느껴 우셨다. 해가 진지 오래되었지만 엄마와 나는 잊지 않으리라는 약속만 되풀이하며 자리를 쉽게 떠나지 못했다.
임의로 편성된 조의 명단들이 발표되자 강의실이 크게 술렁였다. 사진과에서 가장 불편한 사이로 알려진 네 명이 같은 조가 된 것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 넷의 중심에 서 있다고 알려진 것이 바로 나였다.
과제는 한 가지 풍경을 두고 네 가지 관점에서의 사진을 찍어오라는 것이었다. 사진 찍을 장소를 정하기 위한 회의 시간이 주어졌는데, 첫 모임부터 삐걱거리게 생겼다고 여기저기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짜증이 치밀어 올라 일어서려는데, 나머지 세 명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나를 붙잡았다.
모두에게는 안됐지만, 전혀 잘못 짚은 일이었다. 나와 인성이가 잠시 헤어질 위기에 처하기는 했었지만, 그것도 옛날 일이다. 나와 정현이, 인성이, 민수. 지금 우리 넷의 사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소문이 시작된 것은 인성이를 두고 내가 민수와 바람을 피운다는 데에서부터였다. 이 사건의 진상은 인성이와 크게 싸우고 우울해하는 내게 민수가 술을 사 주었으며, 이 또한 인성이가 민수에게 중재를 부탁해서였다는 것이었다.
정현이와 나는 1년 전에 잠깐 사귀다 헤어졌으나 지금은 서로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 게다가 정현이와 인성이, 민수는 과에서 가장 친한 친구였다. 사람들은 우리가 <사랑과 전쟁>에나 나올 법한 사랑싸움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내가 과거의 남자친구, 현재의 남자친구에 이어 미래의 남자친구까지 한 번에 끼고 있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막상 우리 네 사람은 앞으로 나설 용기도 없이 뒷말을 일삼는 사람들을 상대해서 뭐하냐는 공통된 생각이었다. 일단은 우리 자신에게 전혀 찔리는 부분이 없어 당당할 수 있었고, 일일이 해명하기도 귀찮은 일이었다.
당연히 촬영지를 정하는 문제도 일사천리로 해결되었다. 내가 연천의 숨은 명소인 재인폭포를 추천했고, 모두가 내 안목을 믿는다며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남들에 비해 유달리 짧았던 회의 시간이 또 오해를 불러오겠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회의 시간을 늘리는 수고를 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역시 장소 선정은 미경이가 최고지.”
재인폭포 앞에 선 우리는 폭포의 절경에 한참 동안 할 말을 잃었다. 높이가 거의 삼십 미터에 이르는 스카이워크 전망대 위에서 폭포를 내려다보니 아찔하기까지 했다. 산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 그 구멍으로 누군가 한 줄기 물을 흘려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계곡이라 하면 보통 아주 맑거나, 아니면 깊이 때문에 청록색을 띠고 있는 물을 상상하는데 이곳의 물은 녹색이라기보다는 하늘색에 가까웠다. 굳이 비유하자면 도자 박물관에나 놓여 있을 법한 고운 청자의 빛깔이었다. 평지가 내려앉아 생긴 협곡이라 그런지 폭포를 감싼 절벽이 주상절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리는 네 가지 시선을 폭포와 폭포 위의 용소, 폭포 아래의 못, 그리고 주상절리로 나누었다. 두 명이 위에서, 두 명이 아래에서 찍기로 결정이 나자 정현이와 민수는 한사코 고집을 부려 나와 인성이를 폭포 아래로 내려 보낸다.
“아까 들어오는 길에 있던 안내판 봤어?”
내가 고개를 젓자 인성이가 안내판에 적혀 있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재인폭포에 대한 전설은 두 가지로 전해진다. 첫째, 재인의 아내를 탐했던 원님이 재주를 부리게 하여 재인을 죽인 이야기. 둘째, 재인이 남의 아내를 탐하여 재주를 부리다 죽은 이야기. 전설과 문헌이 서로 달라 두 가지를 모두 기록해 두었단다. 어느 쪽이 맞는 이야기일까에 대해 잠시 실랑이를 벌이다가 곧 웃으며 그만두었다.
“시선의 차이지, 뭐.”
부스스 바람이 떨려옵니다. 바람이 떨리니 비자나무숲도 함께 떨립니다. 살림이 가지런히 정리되어있고 마당에는 은행나무 잎이 우수수 떨어져 손님들을 먼저 맞이합니다.
인기척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고택에서 마른기침 한번 나더니 새하얀 버선을 신은 고산 윤선도선생이 걸어 나왔습니다. 크게 한숨을 쉬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더니 몸종을 불러 앞 강가에 나가자고 말했습니다.
“바람이 잔잔히 부는구나. 고기를 잡을까. 그냥 낚싯대만 드리울까.”
한손에는 부채를 들고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봅니다. 숨 한번 쉬고 시조 한번 읊으며 한가로이 시상을 떠올리고 있었지요.
그 때 고산의 증손인 윤두서 선생이 멀찌감치 고산을 바라보았습니다. 윤두서 선생은 윤선도 선생께 가볍게 인사를 올린 뒤 가만히 윤선도 선생이 시조를 읊는 것을 듣고 있었지요. 그러다 어렵게 말 한마디를 붙였습니다.
“한양의 소식은 이제 궁금하시지 않으신가봅니다.”
“그래. 이렇게 강과 바람과 흙과 함께하는 데 한양인들 벼슬인들 그 무엇이 이보다 더 좋겠느냐.”
“예. 저도 외조부를 따라 여기서 시를 짓고 자연과 벗 삼아 지내는 삶이 더 좋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윤두서 선생은 자리에 앉아 오늘 강가에서 바라본 갈대와 물결 그리고 바람의 존재를 알려주는 작은 꽃들의 움직임을 시로 표현하기 위해 짧게 그림을 그려놓았습니다.
윤두서 선생은 즐겨 쓰던 붓이 닳아 새로운 붓을 사기위해 화방에 들렀다가 우연히 중국의 한 화책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한순간 화책에 매료된 선생은 곧바로 화책을 사들고 집으로 왔지요. 한 장 한 장 넘기며 그림을 보는 순간 시조를 읊고 시를 완성해나가는 것만큼의 감동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윤두서 선생은 그 자리에서 자신이 바라본 강, 바람, 풍경들을 쉼 없이 그려나갔습니다. 날이 어두워지는 줄도 모른 채 붓을 계속 휘둘렀지요.
날이 밝았으나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는데 열중한 나머지 매일 문안인사를 드리는 시간을 놓쳐버렸습니다. 큰일이라도 난 줄 안 윤선도 선생이 윤두서 선생의 집에 찾아왔지요. 그런데 방안에는 수없이 그려놓은 그림들과 화선지들이 놓여 있었습니다. 윤두서 선생은 조부인 윤선도 선생에게 어젯밤 있었던 일을 말했습니다.
“두서야.. 그렇게도 그림이 좋으냐.”
“예. 그림은 글로 표현하는 것보다 더 강한 인상을 주고 더 깊은 여운을 남기기에 좋습니다.”
“그래도 난 네가 나와 같은 길을 걸었으면 좋겠구나.”
할아버지 윤선도의 만류에도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은 윤두서 선생은 자연풍경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삶을 고스란히 담은 풍속화를 그리는 데 열심을 다했습니다. 비록 유배지에서의 생활이었지만 이로서 더욱 백성들의 삶을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지요.
윤두서 선생의 그림에 대한 열정을 본 윤선도 선생도 끝내 그 고집을 꺾을 순 없었습니다.
며칠 뒤 윤선도 선생과 윤두서 선생은 예전의 그 강가에서 다시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윤선도 선생과 윤두서 선생은 각자 먹 그리고 화선지를 앞에 두고 말없이 붓을 들었습니다.
윤선도 선생은 해남의 물과 달, 바위와 소나무, 대나무의 덕성을 종이 한 장에 담았고 윤두서 선생은 화선지 한 장에 얇은 붓이지만 정확한 필치로 강하고 힘 있게 해남의 정경을 한 폭의 그림으로 담아내었습니다.
윤선도 선생의 한 장의 시조와 윤두서 선생의 한 장의 그림이 어우러져 초록비가 내리는 해남에 하얀 불꽃을 만들어냈습니다.
토요일, 이월드에 가는 날이다. 꼬박 한 달을 준비하고도 자꾸만 뭔가 아쉬워서 결국 어젯밤에 잠을 거의 자지 않고 작업에 몰두했다. 세수를 마치고 거울 앞에 섰는데 눈 밑이 시커멓다. 좀처럼 차분해지지 않는 머리를 매만지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데이트하러 가는 것도 아닌데 단장은 해서 뭐하겠는가.
내 이름은 유현주, 스물세 살, 휴학 후 대학에서 알게 된 언니가 운영하는 옷가게에서 파트타임 아르바이트 중. 하지만, 오늘의 직업은 젊은 예술가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이것저것 만드는 것을 좋아했고, 미술 시간이 오면 내가 항상 반에서 최고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예를 전공할 생각은 없었다. 만드는 일은 그야말로 취미일 뿐 내 장래희망은 심리학자였다. 그래서 고등학생이 되고부터는 틈날 때마다 심리학 관련 서적을 읽었고, 지금은 유명한 수도권 사립 대학교에서 심리학과를 전공하고 있다. 잠도 줄이고, 코피를 수십 번 쏟아가며 수험 생활을 견딘 끝에 얻어낸 값진 결과다.
그러나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에도 변화는 없었다. 나는 틈만 나면 팔찌나 머리끈, 선물상자 같은 자질구레한 것들을 만들어 친구들에게 선물하곤 했다. 자질구레하다고는 해도, 십 년 가까이 갈고 닦은 솜씨라 ‘예술 전공해도 되겠네!’라는 농담을 종종 듣기도 한다. 후회하지는 않지만, 역시 아쉽기는 했다. 공부가 잘 되지 않아 우울한 날이면 어김없이 공예를 전공할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롤러코스터처럼, 내 안에서 심리학과 공예가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언니가 자리를 비울 때면 틈틈이 공예품들을 만들곤 했는데, 단골로 가게에 드나들던 여고생들 중 하나가 여기에 관심을 보인 것이다.
“우와, 언니. 이것도 파는 거예요?”
“아, 아니요. 이건 제가 그냥 취미로 만드는 건데…….”
학교가 아닌 곳에서 칭찬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고맙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해서 만들던 팔찌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 하나를 건네주었는데, 다음 날 그 아이가 친구들을 더 데려왔다. 만드는 법을 알려 달라는 아이도 있었고, 그냥 여기서 팔면 안 되냐고 묻는 아이도 있었다.
그 때는 가게에 언니가 있어서, 자칫 곤란해 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당황한 얼굴로 언니의 표정을 살폈는데, 언니는 ‘그런 재주가 있으면 말을 해 주지 그랬어.’라며 웃었다. 알고 보니 언니도 학생 때부터 취미로 그림을 그리셨는데, 장사를 하시느라 그림을 그리지 못한 지 꽤 오래 됐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정말로 내가 만든 팔찌를 진열장에 올리고, 그걸 팔아서 나오는 수익은 내 몫으로 해도 좋다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현주랑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는데, 이번 주말에 시간 어때?”
어딘가 했더니 놀이공원이었다. 웬 놀이공원인가 하면서도 저녁 시간까지 유채꽃밭과 우방타워를 구경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해 질 무렵이 다 되어서 언니가 나를 데려간 곳이 바로 젊은 예술 거래소였다. 매주 토요일, 저녁 시간이 되면 이곳에서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 프리마켓을 연다고 했다.
예술가들이라고 해서 굉장한 사람들만 모이는 것은 아니었다.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며 거리 공연을 하는 사람, 머리띠를 만들어 파는 사람, 나처럼 팔찌를 팔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언니가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예술이란 게 뭐 별거 있겠어? 내가 만들어 낸 것을 남들이 사랑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예술가 자격이 충분하지 않을까?”
그렇다. 그 곳에서는 나도 예술가가 될 수 있었다. 모두가 기억할만한 걸작을 남길 수는 없어도, 다른 사람들을 기분 좋게 만드는 무언가를 남길 수는 있었다. 젊은 예술가들의 거래소. 젊은 예술가라는 말은 아무리 들어도 기분이 좋다.
묵직한 가방을 챙겨 현관을 나서는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제법 예술가 같아 기분이 좋았다. 컨버스를 구겨 신고 집을 나섰다. 오늘 날씨도 맑음, 바람도 선선함. 모든 게 다 완벽하다. 나는 오늘, 젊은 예술가다.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오고 푸른 잎사귀가 넘실거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한 손에는 낯익은 지도와 어깨에는 큰 배낭을 짊어진 남자가 자동차에서 내렸습니다. 레오라는 이름의 요리사였지요. 레오는 세계를 돌며 수많은 요리를 연구하고 만들어왔지만, 한국요리만큼 레오의 입맛과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리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늘 한국요리를 연구하고 만들어왔지만 한국의 전통음식과는 오묘하게 다른 느낌이 나는 것이었습니다.
레오는 얼마 후 미국 열리는 세계적인 요리경연대회에서 당당히 자신이 만들어 낸 한국요리를 선보이고자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오래전 먹었던 한국 음식의 맛이 나지 않아 고민하고 또 고민하였지요. 그렇게 고심만 하던 레오는 직접 한국에서 그 맛과 비결을 찾고자 하였습니다. 한국에 도착한 레오는 이곳저곳을 물어물어 다니며 최고의 재료와 맛을 찾아 떠났습니다. 전국 팔도를 다 돌았지만 이렇다 할 만큼의 특별함을 찾지 못한 레오는 상심하여 돌아가려고 하다 우연히 예전 미국에서 만난 친구 태서의 고향인 정선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밤이 되어도 화려한 불빛이 꺼지지 않고 자신과 비슷한 외모의 외국인들도 많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레오는 이곳이라면 최고의 맛과 비결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되찾았지요. 그런데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술과 게임에 정신이 팔려있었고 한국요리보다 외국 요리들이 더 많이 있었습니다. 실망한 레오는 터덜터덜 길을 나섰지요.
그런데 그때였습니다.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보았지요. 그곳은 온갖 나물들과 생활용품을 파는 작은 시장이었습니다. 파란 눈에 노란 머리를 가진 외국인이 신기했는지 장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레오를 신기하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런 레오의 눈에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 물건을 사고팔고 시장 한편에서는 광대 분장을 한 사람이 가위를 두들기며 무엇인가를 팔고 또 다른 옆에는 저마다 한 그릇의 음식을 먹고 있는 것이 신기하게만 보였습니다.
처음에는 시끄러운 소리에 사람들로 복잡한 이곳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밥 한 그릇을 쓱 내밀더니 한 아주머니께서 말했습니다.
“노란 머리 총각, 밥은 먹었나? 이거 한 그릇 먹고 가, 배고플 텐데”
아주머니는 레오가 말을 알아듣는지 못 알아듣는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연신 웃는 모습으로 그릇을 내밀었지요.
레오도 낯선 사람과 문화가 어색하였지만 웃는 얼굴로 다가오는 아주머니의 성의를 거절하기가 미안해서 많은 사람 틈에 앉아 밥 한 숟가락을 떠먹었습니다. 별 볼 일 없다고 느낀 밥맛이 꿀맛처럼 느껴졌습니다. 밥에 들어간 재료를 살펴보니 흰 쌀밥과 나물 그리고 고추 양념을 한 간장 정도 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좀 더 시장을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시장을 찬찬히 둘러보니 아까 그 밥에 들어있던 나물도 보이고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전도 보였습니다. 신이 나는 노랫가락이 흘러나오고 각종 산에서 나오는 나물들을 팔았습니다. 나물을 사는 사람들은 큰 봉지를 손에 들고 있었고 나물을 파는 아주머니는 나물을 한 움큼 더 집더니 봉지에 담아주었습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모습은 소박하지만 하나같이 행복한 웃음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조심스럽게 아까 먹은 밥이 무엇인지 물어보니 곤드레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더니 봉지 하나 가득 담아주며 말했습니다.
“이렇게 멀리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네. 총각, 밥 맛있게 먹었다니 그것도 고맙고.
집에 가거든 우리나라 그리고 여기 정선 5일장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고 호호호”
레오가 돈을 내밀자 아주머니께서는 사양하시며 빙그레 웃고는 돈은 다음에 올 때 달라고 하였습니다.
레오는 서툴게 감사함을 전한 뒤 마을을 떠났습니다. 얼마 후 레오는 세계요리경연대회에서 한국인의 마음이라는 제목의 음식을 선보였습니다. 소박하지만 정성스럽게 차려낸 밥상에는 곤드레 나물밥과 메밀부꾸미, 그리고 김치가 있었습니다. 다른 요리들에 비해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누구의 요리보다 특별했습니다.
지금도 레오의 마음에는 그날의 기억이 선명히 남아있습니다. 웃으며 밥 한 그릇을 건네주던 아주머니의 미소 그리고 정선 5일장의 많은 사람의 행복한 웃음소리 말입니다.
한낮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벽빛처럼 어둑한 날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았다. 차마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그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가 없는 분이니까.
한참을 아무 말 없이 바라만 보다가 조금은 진지하게 묵례를 했다. 가볍게 바람이 일자 은행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내가 선생을 이토록 추억하는 건 선생에 대한 감사와 존경도 있겠지만 생각이 가진 무게와 선생이 늘 지니고 있던 칼의 무게 때문이다. 어찌 보면 나라의 한 국민이었고 한 가정의 가장이었던 그가 그 기다란 칼 하나에 온 백성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야 했기에 그 짐이 얼마나 무거웠을까 생각한다,
전쟁이 일어나면 하루에 수십 명 아니 수백 명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할 것이고 그것은 단 한 사람의 목숨이 아니라 이 나라 이 백성들의 목숨이고 이는 한 가정의 기둥의 목숨이기 때문에 늘 고뇌에 차있고 누구보다 두려웠으리라 생각한다. 눈을 뜨고 감는 것이 두려웠을 것이고 말 한마디에 수백만의 목숨과 나라가 달려있었기에 태산 같은 두려움이 물밀 듯이 밀려왔으리라.
그래도 그가 그의 삶을 다하는 순간까지 지키려고 했던 것은 무엇일까.
긴 칼로 누구를 벨 것인가. 내가 베고 있는 것이 적장의 목숨일까 혹 자신의 삶이 아닐까 선생은 하루에 수도 없이 고민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직분을 숙명처럼 고스란히 받아냈다. 물러서지 않고 당당하게 맞섰다.
갑옷의 무게만큼이나 무겁고 고된 삶 때문에 선생은 지친 몸을 뉘일 때도 차마 그 짐을 내려놓지 못했다. 언제든 일어나 적과 맞설 수 있도록 갑옷을 입고 칼을 옆에 두었을 것이다.
날이 점차 밝아졌다. 조금은 무거운 바람이 일자 대나무 숲에서 기분 좋은 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은 늘 한적했다. 사람이 거의 없었고 조용했다. 짙은 안개가 발아래 깔린 것만큼 진중하여 숨소리 한번 내기가 조심스러울 정도다.
내가 가진 삶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생각한 적이 있다. 내가 가진 무게는 도대체 얼마나 되기에 이렇게 힘들어 하냐고 내 자신을 채찍질 하고 싶을 때 이곳을 찾곤 한다.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보낼 때. 이곳을 찾아 그분을 생각한다.
한참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아무런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았음에도 이곳을 찾으면 큰 위로를 받곤 한다. 그분의 칼을 보고 위로를 받는다.
날은 이제야 겨우 한낮의 빛을 찾았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요란한 벨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친구의 전화다.
“어디야? 지금 너희 집 근천데 나올래?”
“나 지금 아산이야.”
“너 또 현충사 다녀오는 길이야? 너도 참 대단하다. 사실 장소가 바뀌는 것도 아니고, 매번 갈 때마다 새로워?”
“장소를 보러 가는 것이 아니니까. 네가 뭘 알겠냐.”
“학교에서도 존경하는 위인하면 한결같이 이순신장군이라고 쓰더니... 그래서 언제 올라오는데?”
“지금 가는 길이야.”
다시 이곳을 찾을 때에는 내 삶의 무게에 대한 답을 들고 오고 싶다. 그리고 선생과 함께 다시 한 번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 보니 거실이 시끌시끌했다. 방 안에서 잠시 무슨 소린지 들어보니 손자가 어딜 놀러 가자고 조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거 그냥 가고 싶은 데 가게 두지 그러냐.”
내 말에 며느리가 손사래를 친다. 학교에서 고장의 이름 난 장소에 가 보고 기행문을 써 오라고 했다는데, 글쎄 수혁이 고 놈이 용인하면 에버랜드 아니냐며 놀이동산에 가겠다고 떼를 쓰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민속촌에 가면 어떻겠냐는 며느리의 말에, 손자는 민속촌에 가겠다고 한 친구가 반에서 열 명이 넘는다며 싫단다. 며느리는 또 에버랜드도 반 친구들이 스무 명은 가겠다며 되받아치고, 실랑이가 끝날 기미가 안 보였다. 게다가 때마침 일터에서 돌아온 아들놈은 할아버지까지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실 수 있는 곳으로 다 같이 가자고 하니, 이것 참 큰일이다.
수혁이는 토라진 듯 방에 들어가 한참이나 컴퓨터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다들 마음에 들어 할 거라면서 개선장군처럼 방문을 박차고 나왔다.
결국 주말에 나서기로 한 곳은 호박등불마을이었다. 다른 것은 제쳐두고, 일단은 이름이 참 마음에 들었다. 왜 이런 이름이 붙었는지를 묻자 수혁이가 손을 번쩍 들고 대답한다.
“여기가 호박도 유명하고, 등잔 박물관도 유명하고, 또 숯가마도 유명하대요! 그런데 전 은하초코기사단 가서 초콜릿 만들 거예요!”
“그건 안 돼. 엄마가 벌써 호박 떡케잌 만들기 체험 신청 해 놨거든.”
차 안에서 또 한 바탕 난리가 났다. 아들은 그냥 하하 웃는다. 시끌벅적한 것이 우리 집의 장점이기는 하다만, 무슨 일을 벌일 때마다 이렇게 난리가 나니 늙은이로서는 귀가 아파 견디기가 힘들다.
내 행선지는 벌써 등잔 박물관으로 정해진 모양이었는데, 내가 적적할까봐 아들이 같이 가겠다는 것을 그냥 수혁이랑 수혁이 엄마 따라 가라고 보내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수혁이는 엄마랑은 말도 하지 않겠다며 호박등불마을 입구에 도착할 때까지도 입이 비쭉 나와 있었다. 아들이 가서 중재를 해 주지 않으면 기껏 신청했다던 체험 학습도 다 망치고 올 판이었다.
호박등불마을 체험장에서 길 하나만 건너면 등잔 박물관이었다. 체험장으로 들어가는 수혁이와 아들 내외에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등잔 박물관으로 향했다. 등잔이라고 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설렜다.
내가 어렸을 때,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수십 여 년 전 쯤에 어머니는 호롱불을 밝히고 바느질을 하셨다. 따뜻하게 데워진 아랫목에 어린 아들을 소중히 뉘이고 밤이 늦도록 다소곳하게 앉아 옷감들을 매만지셨다. 이제는 어머니라는 단어가 새삼스럽다. 물론 어머니가 보고 싶다는 말을 입 밖에 낸 적은 없지만, 수혁이와 며느리가 투닥거리는 것을 보고 있으면 종종 부러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어머니는 오래 전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를 생각하고 감정이 북받쳐 오를 시기는 진즉에 지났다. 다만, 호롱불 아래 일렁이던 어머니의 그림자와 고운 옆모습을 한 번만 더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장승과 연못가의 석탑을 거쳐 걸으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괜히 뒤를 돌아다보며 혹시 수혁이랑 아들 내외가 시간 저편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을 했다. 내가 등잔불 아래의 열 살 배기로 돌아가 버린다면, 지금 저 귀여운 열 살 배기도 사라져버리겠지. 웃음이 나왔다. 암, 할애비는 그냥 수혁이 할애비지.
씩씩하게, 하지만 느린 걸음으로 박물관을 돌아보았다. 어머니의 냄새가 시간을 건너온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박물관 앞마당에 앉아 정원을 바라보고 있자니 저만치서 수혁이가 달려와 입에 뭘 쑥 넣어준다.
“할아버지, 내가 만들었어요!”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며느리가 ‘저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이!’하고 쫓아오는 통에 수혁이가 도망을 친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껄껄 웃었다.
딱 한잔만 더 마시고 들어갈게. 누군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듯이 건넨 혼잣말이다. 벌 써 몇 병째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그는 되뇌었다. 마지막이라고. 남은 소주잔 이거 딱 한잔처럼 마지막이라고. 남자는 중얼거렸다.
남자는 어두운 실내 포장마차에 있었고 홀로 앉아있었다. 남자가 벌인 네 번째 실내 포장마차 사업장이었다. 매번 반짝 장사가 되다가 나중에는 파리만 날리는 쪽박집이 되기 마련이었다. 봄이 되면 꼭 가게를 빼줘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하고 돌아서는 건물주의 당부가 있던 날이었다. 그렇다고 남자가 성실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늘 좋은 재료를 위해 새벽시간을 아끼지 않았고 대박 집과 쪽박 집을 나름대로의 계산에 맞춰 비교도 해본 그였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무언가 승부수를 걸어야만 했다.
남자는 귀여운 딸아이와 예쁘고 상냥하던 아내를 생각했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딱 한잔만 더 하고 들어갈게, 마지막이야.
반짝 들어오는 햇빛에 눈이 부신 남자가 게슴츠레 눈을 떴다. 식탁에는 콩나물국이 놓여있었다. 아내가 왔었나보다 생각했다. 남자는 하나부터 천천히 다시 시작해보기로 한다. 그동안 무엇이 문제였는지 재료인지 인테리어인지 품목선정인지. 무의식중에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틀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아내가 아침상을 다 차려놓고 나간 터라 더 이상 꺼낼 반찬이 없었음에도 남자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우연히 슬라이스 치즈가 눈에 띄었다. 술을 마시고 난 다음날 아침 느끼한 치즈를 먹는다는 것, 다른 날 같았으면 쳐다도 안보고 아내가 끓여놓은 콩나물국을 후루룩 마셨겠지만 남자는 치즈 한 장을 집어 들었다.
냉장고에 있어 차가운 치즈는 입안에서 쉽게 녹지 않았다. 중얼거렸다.
‘치즈가 따뜻했으면 좋겠어’
남자는 그 순간 낙뢰가 하늘에서 번쩍 치듯 치즈 하나면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동안의 사업 아이템과는 느낌이 달랐다. 그의 머릿속엔 온통 치즈 생각뿐이었다. 좀 더 체계적인 사업 구상을 하기 위해 남자는 임실로 향했다. 남자에겐 이번이 마지막이었으니까.
치즈 나라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공간. 그곳엔 치즈의 모든 것이 담겨있었다. 치즈 하나로 만들 수 있는 다양한 음식부터 맛과 발효과정까지. 남자는 벌써부터 심장이 두근거렸다. 치즈 하나면 누구나 만족시킬 수 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내년 봄이 되면 꼭 방 빼주셔야 해요.’
건물주가 이번엔 아내를 찾아간 모양이었다. 다시 한 번 귀여운 딸아이와 상냥한 아내를 생각했다. 남자는 성실하게 치즈로 만들 수 있는 음식들을 떠올렸다. 치즈의 맛을 끝까지 살리며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차별화 된 음식들이 무엇인지를.
남자는 아이들을 위한 치즈 그라탱부터 미니 피자 그리고 치즈의 고소하고 부드러운 맛이 일품인 치즈케이크를 디저트로 만들기로 했다.
“다음 달도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지요.”
건물주가 웃으면서 재계약을 하러왔다. 남자는 더 이상 어두컴컴한 방에서 홀로 마지막을 되뇌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귀여운 딸아이와 상냥한 아내와 함께 식탁에 앉아있을 것이다. 오늘도 그의 가게에서는 고소하고 부드러운 냄새가 난다.